글, 사진. 이영철 여행작가, <안나푸르나에서 산티아고까지> 저자
나답게 사는 게 무엇인지, 내가 어떨 때 행복한지, 동해안 해파랑길 770km를 걸으며 그 답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두 번째 계획을 위한 훈련, 해파랑길
‘백수 아빠가 준비해주신 오늘 아침 호화 식단’. 출근하는 딸이 전철 속에서 올려놓은 SNS 사진을 보며 기분이 좋아졌다. 삶은 계란 으깬 감자샐러드 옆으로, 딸기 세 알과 사과 두 조각 그리고 우유 한 잔이 넓고 하얀 접시 위에 소담스럽게 담겨 있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에서 돌아온 남편이 ‘앞으로 아침식사는 내가 챙길게’라고 호언했을 때 아내는 긴가민가하는 표정이었다. 퇴직한 남편에게 가장 신경 쓰이는 건 하루 세 끼를 꼬박꼬박 챙겨줘야 하는 것이었는데, 한 달 이상 집에서 받아만 먹던 ‘삼식이 세끼’ 남편이 네팔 여행에서 돌아오곤 기분 좋게 변했다. 아침식사 챙긴다는 약속이 작심삼일일 줄 알았는데 아직까진 몇 달째 꾸준하다. 집안일도 예전과 달리 적극적으로 도와준다. 대견한 일이다. 다시 해외 트레킹 나간다고 하면 적극적으로 밀어줘야겠다는 생각이 아내 마음속에 들어앉을 법하다.
그런 아내의 내심을 간파한 남편은 은근슬쩍 두 번째 계획을 꺼낸다. 10월 초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45일간의 스페인 여행, 거금 450만 원을 지출해야 하는 계획이다. 장시간 걷는 여행이 무리인 아내는 분명 못 간다고 할 줄 알면서도 일단은 함께 가자고 조른다. 아내의 반응은 역시 ‘혼자 무탈하게 잘 다녀오시라’였다. 5개월 후에 떠날 여행이지만 안나푸르나 트레킹 때와는 달리 사전 준비와 훈련을 좀 더 착실히 챙기기로 했다.
사춘기 소년 같은 감상에 젖어
45일 여행 중 30일 동안을 쉼 없이 걸어야 한다. 총거리 800km에 가깝다. 우선은 한 달 동안의 장거리를 내가 과연 잘 걸을 수 있을지 체력 확인이 필요했다. 또한 전지훈련도 해야 한다. 이곳저곳 국내 도보여행 길들을 검색해 보다가 동해안 해파랑길이 조성되고 있음을 알았다. 뭔가 확 꽂혔다. 총거리 770km이니 산티아고와 비슷하다. 해안선만 따라 걸으면 될 터이니 길을 잃을 염려도 없을 것이다.
걷기 좋은 5월의 봄날, 부산 오륙도 앞을 출발했다. 난생처음 만나는 이기대 절벽길은 나에겐 놀라움이었다. 오른쪽 발밑 절벽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와 함께 울창한 숲길을 걷고 구름다리를 지난다. 멀리 광안대교 옆으로 보이는 센텀시티 고층빌딩들 전경이 경이롭고 이국적이었다. 홍콩까지 2,029km라는 친절한 이정표가 아니더라도 홍콩 산 위에서 도심을 내려다보는 느낌이다. 동생말을 내려와 광안리와 해운대 해변, 그리고 문텐로드 지나 송정해변까지 이어지는 해파랑길 첫날 여정은 사춘기 소년 같은 감상에 젖어 걸은 시간이었다. 언젠가 택시 타고 훌쩍 지났을 길들을 배낭 지고 두 발로 뚜벅뚜벅 걷는 내내 가슴이 벅차올랐다. 대변항 멸치쌈밥 점심도 좋았고, 부산 친구가 달려와 사준 기장 곰장어도 짚불에 구운 맛이 일품이었다.
임랑해변까지 이어지는 해파랑길 1~3코스는 부산 갈맷길 9개 코스 중 1, 2코스와 온전히 함께하고, 4코스 중반부터 9코스까지 울산 구간은 대부분 내륙을 관통한다. 현대차와 미포조선 등 해안가 산업시설들 때문에 삭막할 듯했지만, 옹기마을, 덕하역, 십리대밭길, 솔마루길 등을 지나며 전통과 자연의 운치를 함께 느낄 수 있었다.
_스카이워크와 오륙도가 함께 보이는 전경
_울산 십리대밭
_울산 간절곶 소망우체통
동해안 어촌의 따스한 정경
포항 구룡포항을 지나 호미곶 상생의 손 앞에서 일출을 맞으며 우리 한반도 지형이 유약한 토끼 형태가 아니라 웅비하는 범의 모습임을 새삼 실감한다. 해파랑길 이름에는 ‘뜨는 해’나 ‘바다 해’ 그리고 파란 바다 넘실대는 파도를 바라보며 누군가랑 함께 오손도손 길 걷는 모습이 담겨있다.
화진포 해변에서 강구항 그리고 고불봉 너머 고래불 해변까지의 영덕 구간은 블루로드와 온전히 함께하는 길이다. 송림 우거진 숲길과 쪽빛 바다 해안길이 적당히 교차하며 이어진다. 블루로드는 해파랑길 조성 전부터 전국적으로 꽤 유명해진 도보여행길이다.
해파랑길은 7번 국도와 가끔 겹치기도 하면서 내내 나란히 이어진다. 치유를 소재로 한 여행 영화 ‘가을로’에는 영덕에서 울진으로 이어지는 동해안 어촌 정경이 따스하게 그려진다. 여주인공의 대사를 통해서다.
“동해바다랑 소나무 숲이 있어서 7번 국도가 아름답다고 하지만요. 저런 어촌마을이 있고 그 안에 저렇게 사람 사는 모습들이 있어서 이 길이 더 좋은 거 같아요. 그래서 그런지 이 길을 가다 만나는 마을들은 꼭 그 이름을 불러줘야 될 거 같아요. 안 그러면 서운해 할 거 같아서…. 병곡, 후포, 평해, 월송, 덕산…….”
그렇게 마을 이름 한 번씩 불러주며 울진 구간을 지나고, 삼척 용화해변부터 궁촌역까지 5.4km 구간은 걷지 않고 해양 레일바이크 페달을 밟으며 신나게 달려보는 추억도 만들었다. 묵호등대 오르는 언덕의 논골담길에선 60년대 이 언덕에 살았던 사람들의 애환도 느껴졌고, 옥계항부터 정동진역, 안인해변 지나 주문진해변까지는 강릉 바우길과 온전히 함께했다. 속초 양양 해변부터는 바다 색깔이 은근히 달라짐을 느꼈다. 연둣빛 에메랄드라는 색감 표현이 확 와 닿았다.
_포항 호미곶
_영덕 '대양의 빛'
_영덕 삼사해상산책로
나답게 사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도착한 고성군, 명파리마을과 제진검문소를 지나 드디어 해파랑길의 종착지 통일전망대에 올랐다. 군사분계선까지 이어지는 해안선은 시원했고, 그 너머 보이는 북녘땅은 아련했다. 멀지 않은 저곳 어딘가부터 7번 국도가 다시 이어질 것이다. 언젠가 좋은 날이 오면 아무렇지 않게 홀로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두만강 하류에 있었다는 서수라 마을, 우리 한반도의 동해안 최북단인 그곳까지 뚜벅뚜벅 걸어 올라가는 내 모습을 상상해본다.
“우리 인생에는 각자가 진짜로 원하는 무언가가 있다. 분명 나만의 다른 길이 있다.” 박노해 시인의 사진전에서 본 평범한 글귀인데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아 있다. 시인이 말하는 ‘다른 길’이란 꼭 남들과 차 별화된 다른 길을 말하는 게 아닐게다. 양손의 지문처럼 겉으론 비슷해 보여도 미세하게 다른 나만의 길, 나다운 길을 의미할 것이다.
나답게 사는 게 무엇인지, 내가 어떨 때 행복한지, 동해안 해파랑길 770km를 걸으며 그 답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먼 길을 걸을 때 떠올리는 생각들은 때론 우주를 품을만큼 깊고 원대할 수도 있겠다는 사실도 어렴풋이나마 깨달았다.
‘모든 위대한 생각은 걷는 자의 발 끝에서 나온다’라는 니체의 말을 새삼 떠올렸다. 산티아고로 떠나가기 위한 체력 테스트와 전지훈련 목적의 동해안 해파랑길 여행이 내 인생에 흔치 않을 몇 가지 선물을 안겨다 줬다.
_고성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금강산과 북한
_묵호항의 정겨운 어촌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