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2막을 열다
안나푸르나 트레킹

 글, 사진. 이영철 여행작가, <안나푸르나에서 산티아고까지> 저자

 

직장이라는 굴레에 얽매이다 보면 꿈은 더욱 간절해지게 마련이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내 인생 버킷리스트 1번이었다.

고산마을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 그리고 햇빛에 반사되어 눈부신 히말라야 설산들….

인생 후반을 완전히 바꿔놓은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돌아본다

 

간절한 꿈, 버킷리스트 1번

회사에서 퇴직 통보 받은 날 저녁, 핸드폰 속 지인들에게 스팸 문자를 보냈다.

“29년 회사 생활 끝내고, 저 이제 백수입니다.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앞으론 가진 게 시간밖에 없사오니, 자주 좀 불러서 같이 놀아 주세요.”

대한민국 남자들에게 ‘퇴직’이란 인생에 큰 분수령이 되는 듯하다. 신분과 처지가 하루아침에 360도 바뀌는 것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폼 잡고 내밀던 명함도 없어진다. 지인들과 연락 끊고 두문불출하며 집에서 혼자 술독에 빠지는 선배들 경우도 여럿 봐왔다. 난 절대 안 그럴 거라고 다짐하며 당당한 척 밝은 표정을 지었지만 그 속이야 어디 갈까?

“요즘 뭐하고 지내?” 막 퇴직한 이에게 던지는 이런 질문은 참으로 얄밉고 난감했다. 진정한 호의보다는 은근한 저의가 엿보였다. 속 좁은 피해의식이라고 자책은 하면서도 어쩐지 상대방이 야속했다. “응, 네팔 트레킹 준비하고 있어.”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되자 내심 우쭐해졌다. 측은해하는 표정으로 날 위로하려 했던 친구에게 멋진 카운터펀치 한 방 날린 듯 통쾌해졌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공격 본능이었다.

아침 출근할 곳이 없어진 백수 첫해 2월, 네팔 카트만두행 비행기에 올랐다. 흥분과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얼떨결에 내지른 듯 묘한 후회의 기분까지 들었다. 배낭 하나 짊어진 채먼 길을 걷고, 설산을 누빈다. 세계 각지의 사람들을 만나 함께 걸으며 오순도순 이야기 나눈다. 오랫동안 꿈꿔 왔던 미래의 내 모습이었다. 직장이라는 굴레에 얽매이다 보면 꿈은 더욱 간절해지게 마련이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내 인생 버킷리스트 1번이었다.

_다리에 걸린 오색 깃발은 모든 생명체의 행복을 기원한다는 뜻

 

마주하는 풍경은 경이 그 자체

카트만두에서 아침 첫차를 탔다. 내내 덜컹거리는 너덜길, 낡은 버스 안에서의 불편한 일곱 시간도 나름 행복했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는 네팔의 산과 들과 마을과 사람들 모습, 단 하나라도 놓칠세라, 졸려오는 두 눈을 부릅떴다. 낯설지만 따스하고 정겨운 풍경들이었다.

해발 800m의 산골마을 베시사하르에서 트레킹을 시작했다. 고산족 사람들의 땀과 노새 배설물로 다져진 히말라야 산길을 올랐다. 장대하게 펼쳐진 계단식 다랭이밭에 눈길이 꽂혔고, 깎아지른 계곡 아찔한 흔들다리 위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수직으로 솟아오른 절벽 중턱 좁은 길을 지날 땐 오금이 저려왔다. 계곡과 절벽 밑을 길게 흐르는 마르샹디 강의 연둣빛 석회수 강물, 고산마을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 그리고 햇빛에 반사되어 눈부신 히말라야 설산들…. 난생처음 해외 트레킹에 나선 나에겐 마주하는 풍경 하나하나 모두가 경이 그 자체였다.

하루 평균 500m씩 고도를 높여갔다. 첫날엔 아득한 신기루처럼 멀었던 안나푸르나 여러 봉우리들이 하루가 지나면 눈에 띄게 가까워지는 게 신기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저절로 미소가 떠오른 게 하루에도 몇 번씩이던가. 히말라야 고산마을의 잠자리는 늘 썰렁하고 추웠다. 가져간 침낭 속에 웅크려 오들오들 떨며 잠을 청했지만 마음은 따스하고 포근했다. 6일째 되는 날 해발 3,500m 마낭에서부터 고산병이 엄습했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묘한 두통이다. 고산 등반이라면 한라산만 여러 번이었고, 백두산은 여행사 지프차를 타고 한 번 올랐을 뿐인 나였다.

9일째 되는 날 해발 4,500m의 쏘롱페디 식당 안은 패잔병 집합소를 닮았다. 트레커들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이미 고산병을 앓고 있거나 또는 고산증에 대비하는 자세인 것이다. 인근 하늘에서 헬기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청년 두 명이 식당으로 들어오더니 한쪽 귀퉁이에 누워있던 동료 한 명을 둘러업고 나간다. 업힌 환자의 표정이 너무나 서글프고 가련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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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석들이 언제 굴러 내려올지 모르는 산사태 위험지역

 

별들에 더 가까이 다가가다

깎아지른 급경사 얼음길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고산병에 시달려온 머리는 끊임없이 지끈거리는데 그 위로 오후의 뜨거운 햇살이 송곳처럼 내리꽂는다. 발자국 두 번 내딛고 멈춰서선 심호흡 크게 몇 번 하기를 반복했다. 쏘롱페디에서 하이캠프까지 2km, 고도 200m를 올리는 데 세 시간이 걸렸다.

고산병에 좋다는 마늘수프 한 그릇 겨우 비우고, 고산병 약인 다이아막스 두 알 먹고 침낭에 들었다. 부족한 산소와 침낭 속 답답함에 잠을 설치다 비몽사몽간에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반. 침대 밑 보온병을 열어 따뜻한 꿀물을 반 컵 따라 마셨다. 두통에 효과 있다 하여 저녁 먹은 후 식당에서 사왔지만 밤중에 화장실 갈 일이 끔찍하여 참고 참다가 마신 거였다.

소변을 참다가 밖으로 나왔다. 문 하나만 열면 그대로 설원이다. 무수한 별빛과 하얀 눈 덕에 주위는 밝았다. 조금만 움 직이면 화장실이지만 왠지 무섭고 꺼림칙했다. 무의식적으로 잠깐 주변을 둘러보곤 선 채로 슬며시 소변을 보았다. 안나푸르나의 밤하늘은 새삼 더 찬란해 보인다. 해발 5천m에 가까이 올라왔으니 별들과의 거리도 그만큼 더 가까워진 셈이다. 길게 팔 뻗으면 별 한두 개쯤 손바닥에 살포시 내려와 앉을 것만 같다. 안나푸르나 설원에서의 마지막 날 새벽의 기억은 꿈이었는지 생시였는지 지금도 몽롱하다.

_안나푸르나의 새벽, 별빛이 쏟아질 듯 황홀하다


인생의 정점이 아닌 새로운 시작

그리고 다섯 시간 후인 그날 아침 9시 반, 마침내 안나푸르나 서킷 코스의 정점인 쏘롱라 고개에 올랐다. 10일 동안 걸어 백두산 두 배 높이인 해발 5,416m에 도달한 것이다. 스스로 얼마나 감격적이었을까. 허나 그때를 추억하면 많이 아쉽다. 험난했던 여정을 돌아보며 가슴 벅차오를 만도 했지만 그러질 못했다. 경황이 없었다. 체력 고갈과 고산병 증세로 며칠째 두통에 시달린 뒤였다. 남들과 같은 감격의 눈물 따위도 없었다. 저 아래 까마득한 묵티나트까지 과연 내가 안전하게 하산할 수나 있을지 공포에 가까운 걱정과 두려움 뿐이었다.

가파른 눈길을 비몽사몽 내려왔다. 오를 때와는 전혀 다른 긴장의 연속이었다. 더듬더듬 기어내려 산 중턱 안전지대에 겨우 이르렀다. 뒤돌아 정상을 올려다보자 비로소 눈물이 쏟아졌다. ‘내 인생도 이제 정점을 지나 내리막이구나’하는 회한이었는지 아니면, 정상에서 흘렸어야 할 가슴 벅찬 감격의 눈물이 뒤늦게 쏟아진 것이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퇴직 후 곧바로, 당차게 도전한 해외 첫 트레킹이 내 인생 후반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우리 인생의 일들은 겪을 당시엔 그 의미를 잘 모른다. 특히 여행이 가져다주는 변화는 대체로 뒤늦게 감지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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