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제공_ 영집궁시박물관
본래 우리 민족은 활 만드는 데 탁월한 기술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삼국시대부터 궁시가 크게 발전하였고, 그중 고구려 활의 형태는 현재 사용하는 국궁과 같음을 벽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궁시장 유영기의 장인정신을 통해 우리 문화의 얼을 되짚어본다.
예로부터 보편화된 활쏘기
_전통화살액자, 궁시장 유영기
궁시장은 활과 화살을 만드는 기능을 가진 사람을 말하며, 활을 만드는 사람을 궁장(弓匠), 화살을 만드는 사람을 시장(矢匠)이라고 한다. 고려시대에도 활쏘기는 중요했으며, 조선 전기에는 과거시험과 무과 과목에 궁술이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부터 조총이 수입되어 활은 전쟁용 무기로서 기능을 상실하였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많이 변화하여 현재는 국궁인 각궁이 보편화되었다.
우리나라 활로는 정량궁, 예궁, 목궁, 철궁, 철태궁, 호고, 각궁 등이 있었다. 그중 현재까지 많이 쓰이는 각궁은 식물성 및 동물성 재료를 복합적으로 섞어 제작함으로써 활의 탄력성을 증가시킨 대표적인 복합궁으로 섬세한 관리를 필요로 한다. 또한 사용자의 체격과 힘에 맞춰 주문 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장인과 사용자 상호 간에 완벽한 이해가 필요하다.
2022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인정된 김성락 궁시장(궁장), 김윤경 궁시장(궁장)를 비롯하여 국가무형문화재 제47호 유영기 궁시장의 뒤를 이은 유세현 전승교육사가 지난 10월 11일, 무형문화재로 인정받았다.
근현대사를 함께한 궁시장의 생애
_유영기 궁시장의 작업 모습
조부 유창원부터 화살 만드는 일을 하는 유영기 궁시장은 1935년 태어났다. 조부의 고향은 경기도 개풍군이었는데 파주시 장단으로 내려와 자리를 잡았다. 당시 화살 만드는 일은 가내수공업으로 이루어져 어린 유영기를 비롯해 누이, 모친 등이 일을 도왔으며, 동네 사람들도 화살 오늬 깎는 단순한 일을 품앗이로 하기도 하였다. 하루에 화살 3개 정도를 만들었는데, 화살 10개면 쌀 한 가마니에 고기 열 근을 살 수 있을 정도로 그 값어치가 높았다.
유영기 장인은 어릴 때부터 부친을 도와 화살 만드는 일을 시작하였고, 15세부터 본격적으로 전수받았다. 1968년 그의 나이 34세에 부친이 돌아가실 때까지 한국전쟁이 발발한 시대적 상황 때문에 화살 제작 공방은 장단군 노상리에서 서장리, 도라산리, 경기도 파주로 여러 차례 이동하였다.
화살의 원 생명은 대나무이다. 어떤 좋은 대나무를 구하느냐에 따라 그 살의 운명이 결정된다. 유영기 궁시장은 군에 입대하기 전부터 아버지를 따라 대나무를 구하러 전국을 다녔으며 입대를 하고서도 휴가 때마다 아버지를 도왔다. 제대 후 본격적으로 가업을 잇기 시작한 그는 구례 산골 마을, 제주도, 충청도, 나치도, 대섬의 가시밭길, 이북면 최전방 등 전국의 좋은 대나무를 찾아다녔다.
국가무형문화재가 되기까지
_유영기 궁시장과 아들 유세현 궁시장이 함께 깃 붙이기를 하는 모습
1961년, 언론인이자 민속학자인 예용해 선생이 부친 유복삼을 찾아왔다. 당시 예용해 선생은 전국에 숨겨진 장인을 발굴해 ‘인간문화재를 찾아서’라는 기획 기사를 한국일보에 연재하고 있었는데 궁시장 중 부친 유복삼 선생이 선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유복삼은 1968년 사망하여 1971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궁시장 보유자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예용해 선생은 우리 전통기술에 대해 장인이 직접 기록할 것을 유영기에게 권하였고, 유영기는 <한국의 죽전>을 시작으로 이후 화살 제작 책자를 여러 권 출간하였다.
1977년부터 전국 및 경기도 민예풍경진대회 10회 입상하였으며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화살 복원에 힘을 쏟아 전승공예대전에서 특별상 등 16회 수상하였다. 1992년 12월 10일 국가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 보유자로 인정받고 나서도 화살에 대한 열정은 멈추지 않았다. 그전까지는 유엽전만 만들었지, 다른 종류의 무기 복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가 궁시장 보유자가 되기 전 육군사관학교 의뢰로 전통 궁술 재현, 무기 제작 및 시연이 여러 차례 이루어졌는데, 이는 아들 유세현 장인과 함께 화살 복원에 참여하게 된 중요한 기점이 된다. 국립고궁박물관의 전신인 궁중유물전시관, 단국대박물관 등의 유물을 보고 참고하여 신기전, 효시, 박두, 편전, 통아, 장전, 주살, 유엽전, 신전, 영전 등을 복원하였으며, 현재 파주 영집궁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_아버지 유영기의 뒤를 이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유세현 궁시장
하나의 화살이 탄생하기까지
화살의 종류로는 나무로 만든 화살촉을 사용하는 박두, 철로 만든 화살촉을 사용하는 철전, 화살의 크기가 작아 애기살로도 부르는 편전, 그 밖에도 대우전, 장군전, 세전, 유엽전 등이 있다. 조선 후기부터 유엽전이 크게 대두하였는데, 철로 만들어진 화살촉의 모양이 마치 버드나무의 잎과 같다고 하여 유엽전이라고 한다. 현재까지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죽시가 유엽전의 형태를 하고 있다. 활 만드는 재료는 대나무, 뽕나무, 물소뿔, 소의 심줄 등이 있다. 화살 제작의 경우 대나무, 싸리나무, 철, 심줄, 새의 깃(꿩 깃), 도피, 아교 등을 주재료로 사용한다.
화살 1개를 만드는 데 130번이나 손이 간다. 온종일 작업해도 3개 정도 만드는 데 그친다. 매년 11월 말부터 한 달간 전국 각지를 돌며 화살 만들기에 적합한 대나무를 구한 뒤 대나무를 50여 일간 응달에 말린 다음 밤새 살을 벗겨 숯불에 굽고 마디를 다듬어 모듬 별로 선별하는 작업을 거친다. 화살촉을 붙일 아교를 만들기 위해 부레를 끓이는 일도 손이 많이 간다. 완성된 화살도 중량을 맞추기 위해 몇 번씩 저울질해야만 한다. 대략적인 화살 제작 과정은 여덟 단계로 나뉜다.
먼저 화살 제작에 필요한 재료를 준비한다. 화살대는 대나무밭에서 베어낸 2년생의 생나무를 약 한 달간 말려 사용한다. 두 번째, 숯불을 피운 대잡이통에 살대를 넣고 갈색으로 구운 뒤 졸대로 화살을 곧게 펴서 교정한다. 세 번째, 위아래의 끝단을 조금씩 깎아서 부레풀칠을 한다. 이는 소심줄을 감았을 때 살대보다 튀어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네 번째, 젖은 소심줄로 감은 뒤 말린다. 이는 오늬1)와 촉이 끼워질 때 감아서 쪼개짐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다섯번째, 아랫부분에는 칼로 속을 파내 얇은 대나무 관을 만든 뒤 상사를 끼운다. 이때 상사2)가 너무 두터우면 공기의 저항으로 멀리 날아가지 못한다. 여섯 번째, 화살촉을 끼우기 위해 무쇠철사를 꽂는다. 무쇠철사는 촉의 길이만큼 잘라 앞부분은 네모지게 두드리고 달군다. 일곱 번째, 화살촉을 제작한 뒤 암틀에 끼워 발로 지탱하면서 양손으로 살대를 돌려주어 화살촉이 단단하게 끼워지도록 한다. 여덟 번째, 화살깃을 다듬은 뒤 부레풀을 칠한 날개에 붙인다. 오늬구멍을 기준으로 3개의 깃을 붙이면 완성된다.
1) 오늬: 싸리나무를 3cm 크기로 자른 후 윗부분은 타원형, 밑부분은 연필심처럼 뾰족하게 깎고 부레풀을 발라 U자 홈을 만든다. U자 홈에 시위를 걸 수 있다.
2) 상사: 화살대보다 조금 굵은 대나무를 약 3.7cm의 길이로 잘라 삶고 속이 비칠 정도로 파낸 얇은 대나무관이다. 화살 앞쪽 살대에 끼운다.
우리나라 최초의 화살 박물관
우리나라 최초의 화살 박물관인 영집궁시박물관은 2000년 12월 30일 개관하였다. 유영기 궁시장이 그간 축적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개관한 영집궁시박물관은 설계부터 조경에 이르기까지 그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정성을 쏟았다. ‘내 생애 잘 되고 못 되고 간에 궁시박물관 하나 지어 놓은 거, 그게 내가 남겨 놓은 하나의 뿌리가 아니냐 싶다’는 궁시장 유영기. 박물관의 이름은 유영기 관장의 아호인 영집과 활과 화살을 일컫는 궁시를 합친 것이다. 현재는 둘째 아들이자 2022년, 제 47호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유세현 궁시장이 운영하고 있으며 국내외 궁시의 비교전시는 물론 전통화살 제작 및 활쏘기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나라 궁시 문화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