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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진진
미술품 비하인드 스토리

글. 이지혜 아트 컬렉터, <나는 미술관에서 투자를 배웠다> 저자

사진제공. 국립민속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홍익대학교박물관, 이중섭미술관

 

역사에 길이 남을 엄청난 역작이나, 대한민국 역사를 바로 쓸 문헌이 발견되는 과정에서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뒤따르는 경우가 있다.

딱딱한 대화만 오가는 미팅이 끝난 후 이어지는 저녁자리에서 흥미진진한 미술품 이야기로 분위기를 전환해보는 건 어떨까?

그 날 식사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주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교양 있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까지 덤으로 얻게 될 것이다.

 

 

폐지 속에서 발견된 희대의 문화재


_정약용, <하피첩(霞被帖)>, 1810년, 종이, 15.6x24.8cm, 국립민속박물관

 

2004년, 경기도 수원의 한 인테리어 업자가 폐지를 가득 싣고 공사 현장 앞을 지나가는 할머니의 리어카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리고 자신이 내놓을 파지와 리어카 속 폐지 사이에 섞여 있던 한 고서적을 맞바꾸었다. 이후 그가 KBS 〈TV쇼 진품명품〉에 이 고서적을 내놓았을 때, 감정위원들은 일제히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문헌에는 남아 있지만 실제로는 확인된 적이 없었던 정약용 선생의 〈하피첩(霞帔帖)〉이었기 때문이다.

〈하피첩〉은 정약용 선생이 전남 강진으로 귀양을 간 지 10여 년이 지난 1810년쯤 본가인 남양주군에서 부인 홍 씨가 보내준 다섯 폭의 비단치마에 두 아들을 위해 쓴 편지를 재단해 책자처럼 만든 서첩이다.

생전 많은 서책을 남겼으나 간찰 외에 본인의 육필이 남아 있는 경우는 드문 만큼 그 가치는 엄청나다. 특히 부인이 시집 올 때 입었던 활옷(혼례복)으로 만든 서첩이기에 더욱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날 프로그램에서 〈하피첩〉은 프로그램 방송 이래 최고 감정가인 1억 원을 받았다.

뜻밖의 횡재를 한 의뢰인은 〈TV쇼 진품명품〉에 출연한 후 〈하피첩〉을 팔겠다며 내놓았다. 최초 협상자는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였던 강진군이었으나 재정이 넉넉지 않은 강진군 입장에서는 의뢰인이 부른 거액을 마련할 수 없었다.

〈하피첩〉은 당시 부산저축은행의 김민영 대표에게 팔렸다. 김 대표는 고미술계의 알아주는 컬렉터였고 그가 구입한 후 〈하피첩〉은 보물 제1683-2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2011년 부산저축은행이 파산하면서 김 대표의 재산 가운데 하나인 〈하피첩〉이 예금보험공사에 압류됐다. 그 결과 2015년 9월 서울옥션의 경매에 〈하피첩〉이 출품된 것이다. 당시 서울옥션은 출품작의 가치를 존중하여 개인 응찰을 막고 공공기관만 응찰할 수 있도록 했다. 이때 서울옥션이 예상한 낙찰가는 4억 원이었으나, 치열한 경합 끝에 국립민속박물관이 7억 5천만 원에 〈하피첩〉을 낙찰받았다. 국립민속박물관이 개관한 이후 가장 비싼 가격에 사온 문화재였다.

 

 

스승의 그림을 몰래 처분한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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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 <산울림 19-II-73#307>, 1973년, 264×213cm, 국립현대미술관

 

한편, 우리나라 최고의 화가로 알려진 김환기 작가의 작품을 두고 벌어진 범죄도 실제로 있었다. 2019년, 스승이 소장했던 그림을 몰래 처분하고 수익을 챙긴 혐의로 제자와 그 일당이 구속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이 일이 한 사람이 저지른 것이 아니라 3명이 함께 벌인 범행이었다는 데 있다.

좋은 작품을 여러 점 소유하고 있던 A교수가 췌장암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수행비서였던 B씨와 가사도우미였던 C씨, 40여 년 동안 제자였던 D씨는 그림을 몰래 반출해 처분한 후 금액을 나눠 갖기로 공모했다.

세 사람은 A교수가 병원에 입원한 사이 창고에서 그림 여덟 점을 몰래 꺼내 빼돌렸다. 이 중에는 김환기 작가가 1973년에 그린 작품 〈산울림〉도 있었다. 작품의 감정가는 55억 원이었지만 제자 D씨는 이를 39억 5천만 원에 판매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렇게 판매한 여덟 점의 총 감정가는 109억 원이었다. 범행 후 수행비서 B씨는 2억 7천만 원, 그림을 나르는 데 일조한 가사도우미 C씨는 1억 3천만 원을 나눠가진 것으로 조사됐고 나머지 금액은 모두 제자 D씨가 챙겼다.

이 범행은 A교수가 사망한 후, 유가족들이 유품을 정리하던 중 해당 작품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려 경찰에 도난 신고를 하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조사 과정에서 제자 D씨는 “A교수가 내게 그림을 가지라고 했다”고 주장했으나, 검찰은 지인들의 진술을 근거로 A교수가 제자 D씨에게 그림의 처분만 의뢰한 것으로 파악했다.

심지어 세 사람이 〈산울림〉을 처분하고 난 후 현재까지 이 작품의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D씨는 작품을 판매해 얻은 돈을 개인 채무 변제와 생활비로 쓰고 서울 잠실의 20억 원대 아파트도 구매했다고 한다. 다행히 〈산울림〉을 제외한 나머지 일곱 점은 피해자 가족에게 다시 반환됐다. 결국 D씨는 징역 4년, 수행비서 B씨와 가사도우미 C씨는 각각 징역 2년과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중섭이 끝내 돌려받고 싶었던 그림


_이중섭, <황소>, 1953년 추정, 종이에 유채, 49.5x32.3cm, 국립현대미술관

 

이렇게 다소 씁쓸한 결말이 있는가 하면, 조금 다른 형태의 스토리도 있다. 컬렉터가 한 작가를 진심으로 후원하면 이러한 순간도 맞게 되는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중섭 작가다. 작가는 ‘소중섭’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역동적인 소를 그려낸 근대미술 작가다.

평안북도에서 부유하게 살았던 그는 6·25전쟁을 피해 가족들과 함께 제주도로 피난을 가게 되면서 극도의 궁핍함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족이 있었기에 그는 행복했다. 피난 중이었지만 당시에 이중섭이 그린 작품들에서는 하나같이 밝고 순수한 동심이 느껴진다.

그러나 일본인이었던 부인이 친정아버지의 부고를 받고 아이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났고 이중섭 작가만 혼자 한국에 남게 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가족들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광복 이후 한일 간의 수교가 끊기면서 입국이 불허되며 부인과 아이들은 한국으로 다시 돌아올 수 없게 됐다. 가족과 생이별을 한 후 그의 그림도 달라졌다. 이중섭은 자신이 직접 일본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1955년 서울 ‘미도파 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이중섭 작가와 동향이던 한 손님이 그가 일본으로 갈 여비를 보태주기 위해 쌀 열 가마니를 주고 가족 시리즈 세 점을 구입했다. 그러나 그는 가족을 그린 그림을 돌려받기를 원했다. 그 그림들을 일본에 가져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평소에 가장 아꼈던 그림으로 맞바꿔주었는데 그 작품이 바로 〈소〉다. 안타깝게도 이중섭은 결국 일본에 가지 못했다. 사무치는 외로움과 고통에 시달리던 그는 마흔살의 젊은 나이에 적십자병원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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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흰소>, 1954년, 합판에 유채, 30x41.7cm, 홍익대학교박물관

 

 

쌀 열 가마니가 47억 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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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현해탄>, 1954년, 종이에 유채·연필·크레파스, 26.4×14cm, 이중섭미술관

 

가난한 작가를 지원하는 마음으로 구입했던 작품의 가치는 이중섭 작가가 사망한 후 천정부지로 높아지기 시작했다. 소장자는 집 안에 걸어 두었던 그림을 1980년경부터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 인감도장으로 봉인한 뒤 은행 금고에 보관해왔다. 이후 밀봉된 채 수십 년간 잠들어 있던 〈소〉는 2010년 서울옥션에 출품되며 40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작품의 낙찰자는 이중섭 작가의 소 그림의 최고 컬렉터로 꼽히는 ‘유니온 약품’의 안병관 회장으로, 이때 낙찰가가 무려 36억 6천만 원이었다. 이후 안 회장은 서울미술관을 지어 작품을 극진하게 모셨다. 그러나 미술관의 계속되는 적자를 메꾸기 위해서 이 작품을 다시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8년 만에 새 주인을 찾기 위해 2018년 서울옥션에 다시 출품된 작품 〈소〉는 작품의 기개만큼이나 가파르게 돌진하여 47억 원으로 가격표를 바꿔 달았다. 쌀 열 가마니가 반세기 만에 47억 원으로 탈바꿈된 동시에, 8년간 작품을 애지중지한 대가로 안 회장에게 12억 원의 차익을 실현시켜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