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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흐릿해지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

글. 장한업 이화여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고귀한 신분일수록 권리보다는 의무가 더 많다는 의미로 자주 사용된 말이다.

로마의 귀족들이 먼저 모범을 보여주었고 우리 선조들도 중시한 가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울림을 주고 있을까?

 

 

로마 귀족들이 보여준 모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프랑스어 문장입니다. 프랑스어로 쓰면 ‘Noblesse oblige’가 되지요. 여기서 노블레스는 ‘고귀한 신분’을 뜻하는 명사이고, 오블리주는 ‘강제하다’라는 동사의 3인칭 단수형이에요.

이 둘을 합하면 ‘고귀한 신분은 강제한다’라는 의미가 되지요. 그렇다면 고귀한 신분은 무엇을 강제하는 것일까요?

고대 로마의 귀족들은 여러 가지 특권을 누렸어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그러한 특권에 상응하는 의무도 잊지 말라는 것이었지요. 실제로 로마의 귀족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스스로 최일선에 뛰어들어 용감하게 싸웠다고 해요. 예를 들어,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이 로마와 벌인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로마의 집정관 13명이 목숨을 잃었어요.

또한 로마의 귀족들은 사회적 지위와 부보다는 과소비를 지양하고 정신적인 가치를 소중히 여겼어요. 많은 학자들은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통일하고 그 맹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로마의 귀족들의 이러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 덕분이

라고 평가해요. 지성을 뽐내던 그리스인, 기술을 자랑하던 에트루리아인, 해상 무역을 장악한 카르타고인 등을 제치고 패권을 차지하고 1천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정신 덕분이라고 본 것이지요.

 

 

조국을 위해 싸운 영국 귀족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19세기 프랑스 정치인이면서 작가인 가스통 피에르 마르크(Gaston Pierre Marc)라고 하네요. 그는 이 표현을 자신의 <격언집>에서 51번째 격언으로 사용했어요. 그는 이 표현을 통해,

귀족들에게는 권리보다는 의무가 더 많았음을 강조했지요.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사례는 영국 이튼 칼리지 졸업생들입니다. 1440년 헨리 6세가 설립한 이 학교는 영국 내에서도 명문 중 명문으로 알려진 학교예요. 이 학교 졸업생 중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목숨을 잃은

학생이 1,157명이라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제2차 세계대전 때도 상당히 많은 학생이 조국을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었어요.

대부분 귀족 출신이었던 이 학교 졸업생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전쟁에 뛰어들어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천했지요. 이튼 칼리지 내에 있는 교회의 벽에는 이렇게 전사한 모든 학생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요.

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포클랜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영국 여왕의 차남인 앤드류 왕자가 헬리콥터를 몰고 참전한 것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적 사례로 남아있어요. 왕위 계승 4위인 왕자가 전쟁 일선에 나선 것은 오늘날까

지도 큰 미담으로 남아있어요.

 

 

화랑정신과 선비정신을 되살리자 



우리에게도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있었어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기여한 화랑정신이나 조선 시대 대의를 위해 목숨까지 버린 선비 정신은 그것과 견주어 볼 수 있어요. 문제는 이런 고귀한 전통이 점점 흐릿해지고 있다는 거예요. 돈 많은 기업의 회장이나 힘 있는 정치인은 자신이나 그 자식들을 군에서 빼기 위한 온갖 수단을 동원하지요. 21대 국회의원 5명 중 1명은 군 복무를 하지 않은 사람이고, S사 일가의 병역 면제율은 70%가 넘는다고 해요. 이런 사람들이 입만 열면 나라 사랑을 외치지만 그것이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에요. 한국은 ‘노블레스’만 있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없는 나라라 할 수 있어요.

오늘은 이 글을 쓰는 저,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우리 모두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하루였으면 합니다.

 

 

Tip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떠올리게 하는 명언들

• “사방백리 안에 굶어 죽은 사람이 없게 하라.” - 경주 최부잣집 가훈

• “사람은 죽으면서 돈을 남기고 또 명성을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가장 값진 것은 사회를 위해서 남기는 그 무엇이다.” - 유한양행 창업주 故 유일한 박사

• “부자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 가장 수치스런 일이다.” - 강철왕 앤드류 카네기(전 재산 기부)

• “많은 것을 받는 사람은 많은 책무가 요구된다.” - 미국 제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