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최원형 생태환경 작가, 서울시 에너지정책위원회 시민협력분과 위원
꿀벌과 함께 지구환경을 지키는 영웅이 있다. 지구의 청소부로 묵묵히 땅을 일구는 동물, 바로 ‘지렁이’다.
10월 21일 ‘지렁이의 날’을 맞아 몰랐던 지렁이의 가치에 대해 알아보자.
찰스 다윈이 연구한 지렁이
_지렁이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던 과학자 찰스 다윈
선입견 때문에 비호감이던 어떤 이가 겪어보니 더없이 좋은 사람이었던 경험이 있을 거예요. 생김새로 비호감을 넘어 혐오감마저 느낄 때도 있지만 알고 보니 생태계에 너무 귀한 동물이 있습니다. 바로 지렁이지요. 가늘고 긴 생김새는 뱀을 떠올리게 하고 뱀은 대체로 위험하기에 인류는 이를 피하도록 진화해왔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하고 싫은 감정이 드는 건 어쩌면 당연합니다. 어릴 적 비 오는 날이면 땅 위로 올라온 지렁이가 많이 보였어요. 짓궂은 아이들이 지렁이가 눈에 띄는 데로 발로 밟아 짓이겨 버리기도 했고요. 그런 광경을 보면서 지렁이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징그러운 동물이 사라지는 것에 안도하는 마음도 솔직히 없었던 건 아니었어요. 지렁이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과학자들 가운데 지렁이의 가치를 가장 높게 평가했던 이는 ‘종의 기원’으로 잘 알려진 과학자 찰스 다윈이었어요. 생전에 마지막으로 출간한 저작도 지렁이에 관한 책이었을 만큼 그는 30년 가까이 지렁이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대부분 하찮게 여기고 심지어 혐오감마저 느끼는 지렁이에 다윈은 왜 이토록 오랜 시간 관심을 가졌던 걸까요? 비글호를 타고 약 5년간의 항해에서 돌아온 다윈은 채집한 온갖 수집품을 정리하고 연구하느라 어느덧 몸이 쇠약해집니다. 모든 일을 중단하라는 의사들의 조언에 따라 슈르츠베리에 있는 삼촌 조스 웨지우드 집에 머무는 동안 삼촌으로부터 지렁이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듣습니다. 땅 위에 있던 낙엽이며 식물의 잔해 등이 사라지는데 아무래도 지렁이 소행인 것 같다는 말에 지렁이에 흥미를 느낍니다. 지렁이를 꾸준히 관찰하며 탐구를 통해 지렁이들이 수십 년 혹은 수 백 년에 걸쳐 서서히 지질학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이 있다는 걸 발견했지요. 그리고 이런 관찰을 통해 얻은 생각이 진화와 종의 기원에 관련된 자신의 연구와도 잘 맞아 떨어진다는 걸 알게 됩니다.
_생김새와 달리 지렁이는 생태계에서 귀한 동물이다
저평가된 지렁이
_지렁이는 토양 건강의 지표로 알려져 있다.
10월 21일은 세계 지렁이의 날입니다. 2016년 영국 지렁이학회(The Earthworm Society of Britain, ESB)는 다윈의 책 《지렁이의 활동과 분변토의 형성》이 출판된 날을 세계 지렁이의 날로 정했어요. 생태계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낮게 평가되어온 지렁이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만든 날입니다. 하루 중 흙 밟을 일이 거의 없는 도시인들이 어쩌다 옷이나 몸에 묻은 흙을 ‘더러움’과 같은 의미로 취급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그렇지만 흙이 없는 지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흙은 생명을 품고 길러내고 생명이 다한 것은 다시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 흙으로 생명이 살 수 있도록 돕는 대표적인 생물이 지렁이입니다. 지렁이는 ‘소리 없이 땅을 일구는 농부’라 불리기도 합니다. 지렁이가 토양 건강의 지표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고요. 생태학자들은 토양의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특성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지렁이를 토양의 ‘핵심종’으로 여깁니다. 지렁이는 낙엽을 비롯한 유기물을 지속적으로 먹고 하루에 체중의 1.5배나 되는 분변토를 배설합니다. 이렇게 배설한 분변토는 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요. 일반 토양보다 분변토는 5배나 영양분이 많아서 비료 대신 분변토로 작물을 재배했더니 수확량이 30% 증가했다는 연구도 있어요.
지렁이는 음식물 쓰레기 처리 기사
_지렁이는 딱딱한 씨앗을 제외한 음식물 쓰레기를 소화할 수 있다.
도시에서 지렁이를 만날 수 있는 쉬운 방법은 음식물 쓰레기 처리 기사로 고용하는 거예요. 우리 집에는 지렁이 사육상자가 두 개 있습니다. 2020년에 지인으로부터 지렁이를 조금 분양받아 기르기 시작해서 작년에 사육상자가 두 개로 늘었어요. 주로 과일 부산물을 사육상자에 넣어주는데 특히 단맛이 나는 과일을 무척 좋아합니다. 한번은 사육상자의 흙에 비닐이 묻혀 있는 걸 발견한 적이 있는데 알고 보니 사과 껍질의 반질거리는 왁스 층이었어요. 왁스 층마저도 시간이 지나니 사라졌습니다. 얼마나 완벽하게 분해하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지렁이에 대한 경외감마저 들었어요.
음식물을 쓰레기로 버리면 악취가 발생하고 처리하느라 비용이 들며 그 과정에서 온실가스도 발생하지만, 사육상자에 들어간 음식물은 지구에 어떤 부담도 주지 않고 고스란히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지렁이 사육상자를 열면 숲에서 맡는 향긋한 냄새가 납니다. 방선균이 활발하게 제 일을 하고 있다는 증거지요. 사육상자의 흙은 점점 초코케이크처럼 검고 폭신하게 바뀝니다. 기름진 옥토로 불리는 우크라이나의 체르노젬이 이렇지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과일 껍질 등 부산물에 함께 딸려 들어간 호박씨가 그 안에서 싹을 틔우고 고구마와 감자 조각들 역시 싹을 틔우고 잎을 내는 장면을 자주 목격합니다. 흙이 얼마나 비옥한지 느낄 수 있는 장면이지요.
생태계 유지를 돕는 일등 공신
_생태계의 핵심 ‘흙’을 부지런히 일궈주는 지렁이.
몽골에서 시작된 황사가 한반도를 덮쳐 대기가 최악일 때가 있었지요. 가뭄과 홍수 등 기상이변으로 토양 침식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지렁이가 살 수 있는 건강한 토양이라면 벌어지지 않을 일입니다. 지렁이는 땅속을 돌아다니면서 공기를 공급하고 물이 잘 빠지도록 토양 구조를 느슨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홍수와 토양 침식을 방지하는 데 도움을 주지요. 한 마디로 숨 쉬는 대지를 만드는 일등 공신이 바로 지렁이입니다. 지렁이는 농약, 중금속 등 토양을 오염시키는 물질에 민감하기에 토양 건강과 독성 정도를 알리는 지표생물입니다. 지렁이는 오염된 땅을 정화하고 손상된 토양을 복구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고 해요. 지렁이는 두더지나 오소리같이 땅속에서 사는 동물, 호랑지빠귀처럼 바닥에서 먹이 활동을 하는 새에게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기도 하지요. 생태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도록 돕는 중요한 역할을 지렁이가 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렁이가 사라진다면 생명체는 흙에서 빠르게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흙은 우리 인류가 발 딛고 사는 곳일 뿐만 아니라 생명을 유지하는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터전입니다. 봄이면 아파트나 공원에 있는 나무를 소독하는 것이 지렁이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염려스럽습니다. 다른 대안은 없을지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흙은 무생물이 아니라 수많은 생명을 품고 있고 그 바탕 위에서 팔십억 가까운 인구를 먹여 살리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입니다. 바로 그 흙이 숨 쉬도록,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물을 품도록 지렁이가 부지런히 일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지렁이와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면 그 터전이 오염되지 않도록 뭐라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