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 궁중음식’ 기능보유자인 한복려 원장은 평생 궁중음식을 공부하며 많은 제자들을 양성해왔다.
세계적으로 한식이 큰 인기를 얻기 시작한 요즘, 한복려 원장에게서 우리가 보존하고 널리 알려야 할 전통 한식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배워보자.
‘대장금’ 자문으로 한식을 세계에 알려
지금 전 세계에서는 이른바 ‘K-푸드’ 열풍이 불고 있다. 그중 김치, 치킨, 떡볶이, 치즈닭갈비, 비빔밥 등이 선두에서 인기몰이 중이다. 하지만 한식에는 이렇게 맵고 짜고 달달한 음식만 있는 것으로 세계인
들이 오해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든다. 좀 더 깊이 있는 맛과 정갈한 상차림에 풍부한 영양까지 골고루 갖춘 우리 전통음식의 원형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궁중음식을 찾아보아야 한다. 궁중음식은 궁궐에서 왕족들만 먹던 것이 아니라 사대부가를 거쳐 일반 민중에게까지도 전해졌으며, 모든 한식의 ‘모범’이 되었던 음식이기 때문이다.
궁중음식연구원의 한복려 원장은 궁중음식의 연구·교육·재현 등을 통해 우리나라의 뛰어난 식문화 전통을 세계에 알리고 계승·발전시키는 데 평생을 바쳐온 인물이다. 특히 국내 시청률이 50%가 넘고 전세계적으로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대장금’에서 음식 자문을 맡아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드라마 ‘대장금’을 통해 우리 국민들과 전 세계인에게 우리나라에 이렇게 훌륭한 궁중음식 문화가 있다는 걸 알렸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낍니다. 또 2000년 남북정상회담 만찬의 메뉴개발과 지원에 참여했던 일도 자랑스러운 기억 중 하나이지요.”
예의와 기품, 조화로운 맛의 궁중음식
그렇다면 한복려 원장이 오늘날 되살리고 싶은 우리 궁중음식의 훌륭한 점은 무엇일까. 첫 번째로는 궁중음식은 예의를 갖춰서 먹는 제대로 된 한 끼 식사라는 점이다. 우리는 특별한 날을 기념하거나, 중요한 분에게 정성껏 식사를 대접하고 싶을 때는 한식보다는 양식 레스토랑을 선택하게 된다. 그쪽이 더 고급스럽고 격식을 갖추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궁중음식을 중심으로 제대로 된 한식 메뉴를 내놓기만 한다면 양식 레스토랑을 충분히 대체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은 대중적으로 그런 인식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궁중음식은 자극적이지 않은 맛으로 조리하여 예의를 갖춰서 먹도록 한 음식입니다. 요즘처럼 불판 위에서 가위 같은 위협적인 도구로 고기를 자른다든지, 요란한 연출을 한다든지 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죠. 매스컴에서 볼거리를 위해 자꾸 그런
음식들만 한식의 대표로 보여주는 것이 좀 안타깝습니다.”
두 번째로는 궁중음식이 가진 복합적이고 깊은 맛이다. 궁중음식에서는 단 한 그릇의 음식에도 많은 정성이 들어간다. 예를 들어 간단한 요리 같아 보이는 무장아찌만 해도 궁중음식에선 그리 간단하지 않다. 무를 간장에 절였다가 쇠고기 장국에 고기를 넣고 함께 펄펄 끓여서 바짝 졸이는 식으로 만든다. 한 가지 재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고 조화로운 맛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궁중 일상음식으로 배우는 한식의 모범
마지막으로 궁중음식에서 화룡점정이 되는 것은 깊이 있는 ‘장 맛’이다.
“우리 한식의 정체성은 잘 발효된 장에서 나오는 ‘감칠맛’에 있다고 생각해요. 감칠맛을 얼마나 잘 살려냈는지가 중요한데 요즘 한식에서 너무 달달하거나 매운 맛을 강조하는 것은 좀 아니라고 봐요. 한식의 이미지가 그렇게 굳어지는 것은 안 좋죠.”
그렇다고 해서 이미 널리 알려진 달고 매운 맛의 한식을 더 이상 알리지 말자는 얘긴 아니다. 그런 음식도 소개하면서 동시에 오리지널 한식이 가진 깊이 있고 풍부한 맛도 함께 세계에 알리자는 이야기다.
그러한 차원에서 한복려 원장은 궁중음식의 다양한 측면을 좀 더 널리 알리고 대중들이 쉽게 접하도록 하기 위해 매년 궁중음식 정기발표회를 열고 있다. 올해는 10월 6~8일에 ‘조선 고종 임금의 추석 명절 수라상’이라는 주제로 공개행사를 개최했다.
“지난해와 올해는 ‘상식 발기’와 ‘주다례’ 문헌을 참조하여 궁중의 일상 음식을 주제로 발표를 했어요. ‘상식’이란 왕실의 상례 기간 중 아침, 저녁으로 돌아가신 분께 평소에 드셨던 일상음식을 올리는 걸 말해요.”
따라서 상식을 통해서 당대 평소 왕이 먹었던 일상음식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올해 행사에서는 추석 때 고종 임금이 먹었던 수라상을 전시하고 그중 일부 음식을 직접 찬합(도시락)으로 만들어보는 실습체험 행사도 열렸다. 적두수라(팥물을 들인 붉은 밥), 섭산적, 나복·란장과(무장아찌), 혜수침채(젓갈을 사용한 젓국지), 과일 등이 주요 메뉴다.
“궁중의 일상음식이나 전통 음식에는 영양학적인 균형이 잘 갖춰져 있어 오늘날 우리가 모범으로 삼을 만합니다. 또 그런 명절 음식을 가족과 함께 만들어 먹을 때 집안에 음식 냄새가 가득 퍼지면서 가족 간 화목도 다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궁중음식의 현대적 계승을 위하여
한복려 원장을 이야기하면서 어머니 황혜성 교수의 영향력과 가르침을 빼놓을 순 없다. 그는 아직도 어머니의 뒤를 잇는 궁중음식 전수자로서 부담감을 늘 안고 살고 있다고 말한다.
“어머니가 사라져 가던 궁중음식 문화를 발견해서 그것을 연구하고 정리를 하셨다면, 저는 그것을 오늘날 어떻게 재현해서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계속 연구하고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앞으로 4차 산업혁명 시대가 오면 궁중음식도 그런 기술들을 활용해서 더욱 발전시키고 보급해야 할 텐데 제가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들어요.”
그는 평소 한식을 주로 먹긴 하지만 아침에는 간편하게 커피와 함께 토스트나 샐러드도 먹곤 한다. 매끼니 한식으로만 챙겨먹는 건 그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편의점 도시락이나 배달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요즘 사람들을 보면 건강을 해칠까봐 마음이 아프다.
한복려 원장도 얼마 전 병을 앓아서 1년간 매우 힘든 시기를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앞으로는 조심스럽게 건강관리하면서 큰 욕심 없이 그저 평생 연구해왔던 것을 후세 사람들이 잘 활용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일에만 집중할 것이라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건강하게 잘 먹고 사는 법에 대해 다음과 같은 조언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음식에 대해 너무 욕심을 내지 마세요. 병이 있으면 음식을 가려서 먹고, 정말 나에게 맞는 음식이 무엇인지 공부해가면서 스스로 식단을 만들어 먹는 지혜가 필요해요. 옛날 우리 선조들에게는 냉장고나 빠른 배송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장기간 음식이 부패하지 않도록 짜게 양념해서 숙성시키는 조리법을 발전시켰어요. 하지만 오늘날엔 그럴 필요가 없으니 건강을 생각해서 되도록 덜 짜게, 적은 양념으로 간단하게 요리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골고루 여러 가지 재료를 넣으면 양념을 적게 쓰고도 음식을 맛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