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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과
기업의 책임

글. 최남수 서정대 교수, 전 YTN 대표이사 

 

신냉전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미국과 중국의 디커플링과 공급망을 중심으로 한 경제 블록화가 시도되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기업은 끊임없이 정치·외교적 압박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전쟁에 대한 ‘정치적 책임 활동’ 논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국제적 공분을 사고 있다. 이번 전쟁은 ESG에 관해서도 관심이 집중되는 계기가 되고 있다. 불법적이고 잔학한 전쟁을 하는 러시아에서 여전히 사업을 하거나 돈을 빌려주는 행위가 ESG 가치와 배치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기업이 사회적 책임 활동을 하는 것과 비슷하게 이런 비윤리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ʻ정치적 책임 활동(CPR: Corporate Political Responsibility)’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다. 즉, 정치·외교적으로 옳지 못한 행위를 하는 러시아에서의 사업을 중단하는 게 ESG 가치에 부합한다는 얘기다.

전쟁 시작 이후 주목을 받은 미국 대학원이 있다. 주인공은 예일대 경영대학원. 이 대학원의 제프리 소넨펠드 교수는 러시아에 진출해있는 기업들이 전쟁 개시 후에 보인 행태에 따라 A~F의 등급을 매기고 있다. A등급은 러시아 사업을 중단하거나 러시아에서 철수한 기업으로 7월 16일 현재 306개에 이르고 있다. B등급 그룹은 일시적으로 일부 또는 전체 영업을 중단했지만, 러시아로 복귀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496개 기업이다. 삼성그룹이 여기에 속해 있다. 가장 낮은 F등급은 전쟁에 아랑곳하지 않고 러시아에서 영업하는 243개 기업이 받았다. 예일대 경영대학원이 이 같은 등급 명단을 수시로 업데이트해 공개하는 것은 기업들이 러시아에서 철수하거나 사업을 축소하도록 압박하기 위한 것이다.

 

현실적으로 기업 손실도 무시 못해 


여론의 압박에 따라 많은 기업이 러시아에서 아예 철수하거나 일시적으로 영업을 중단하는 조치를 취했다. 일본 의류기업인 유니클로의 경우 처음에는 러시아인들도 옷이 필요하다며 러시아 내 49개 점포의 문을 계속 열었으나 여론이 심각하게 돌아가자 마침내 3월 10일 영업을 중단했다. 네슬레로 마찬가지. 처음에는 러시아에서 영업을 계속했지만, 소비자들이 분노를 표시하고 해킹 사건까지 발생하자 핵심적인 품목을 제외한 다른 제품의 판매를 중단했다. 

하지만 이런 요구가 잘못됐다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오랜 기간 러시아에서 큰 노력을 하며 일궈놓은 사업 기반을 정치·외교적인 이유로 하루아침에 포기하라고 하는 것은 경제에 대한 정치의 지나친 개입이라는 지적이다. 특히 현실적으로는 기업이 부담해야 하는 손실 규모가 만만치 않다. 예컨대 러시아 정부가 철수 기업의 자산을 압류하는 방안을 추진함에 따라 메르세데스 벤츠는 22억 달러의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지혜로운 대응이 필요한 때


한국 기업으로서는 ‘남의 나라’ 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꼭 그렇지는 않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서 삼성 등 국내 기업이 영업을 중단한 것은 한국 기업도 CPR을 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더구나 지금은 신냉전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미국과 중국의 디커플링과 공급망을 중심으로 한 경제 블록화가 시도되고 있는 시점이다. 이런 흐름이 지속되면서 기업은 끊임없이 정치·외교적 압박에 직면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특정 국가의 비도덕적, 비윤리적 행태가 문제시되는 상황에서는 이에 대한 입장 표명과 적절한 행동을 요구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 사실 이런 현상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과거에 흑인 차별을 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사업을 하는 기업을 비판하는 여론이 세계적으로 확산했던 적이 있었다. 

IBM은 이 같은 이슈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지를 결정할 때 다섯 가지의 ‘이정표 질문’을 스스로 던져본다고 한다. 이 이슈가 비즈니스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가? 그동안 이런 이슈에 개입한 적이 있는가? 이해관계자들이 무엇이라고 얘기하는가? 경쟁사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개입함으로써 의미 있는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 기업으로서는 지혜로운 대응이 필요한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