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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아니라
평화의 시간,
‘바캉스’

글. 장한업 이화여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바캉스는 ‘비어 있다’라는 뜻의 라틴어 ‘바카레(vacare)’에서 유래됐다. 프랑스인들은 바캉스 기간에 복잡한 일상을 다 떠나 온전히 ‘비어 있는’ 시간을 즐기려고 한다. ‘집 떠나면 고생’인 바캉스가 아니라 ‘진정한 휴식’을 누리는 바캉스를 우리도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 

 

피로가 쌓이는 바캉스는 이제 그만 




우리는 매년 8월 초 바캉스로 전쟁 아닌 전쟁을 치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바캉스를 떠나다 보니 산과 바다로 가는 길은 몸살을 앓지요. 특히 서울과 강릉을 잇는 영동선은 정체는 예사고 주차장으로 변하는 경우도 허다해요. 도로 전쟁이 끝나면 숙소 전쟁이 기다리지요. 요즈음은 인터넷 예약으로 많이 완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숙소 전쟁은 여전히 만만치 않습니다. 이 전쟁이 끝나면 해변에서 자리 잡기 전쟁이 시작되지요. 숙소와는 달리 해변은 예약이 불가한 곳이라 이 전쟁은 더욱 치열해요. 돌아오는 날에는 또 한 번의 전쟁을 치르지요. 이런 전쟁들을 치르면 피로가 풀리기는커녕 오히려 쌓인다고 하는 사람도 많아요. 돈은 돈대로 쓰고 고생은 고생대로 했다고 푸념을 하는 것을 보면요.

 

바캉스의 어원에 충실한 프랑스인들 





바캉스는 이것과는 정반대로 ‘휴식’을 의미합니다. 바캉스(vacances)의 어원은 라틴어 바카레(vacare)예요. 이 동사는 ‘비어 있다’라는 의미지요. 이 동사의 현재분사는 바칸스(vacans)이고, 바캉스(vacance)는 16세기에 이 현재분사에서 파생한 말이에요. 당시 이 단어는 법률 용어로서 ‘부족’이나 ‘결핍’을 의미했지만, 17세기에는 ‘학교에 더 이상 가지 않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지요. 

프랑스인의 바캉스 사랑은 유별납니다. 모든 사람들은 바캉스, 특히 여름 바캉스를 손꼽아 기다려요. 학생들은 두 달 정도, 직장인은 3주나 4주 정도 바캉스를 떠나지요.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긴 시간을 이용해 그간에 쌓인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고 머릿속을 비우려고 하지요. 이걸 보면 프랑스인은 ‘비어 있다’라는 바캉스의 어원에 아주 충실한 사람들인 것 같아요. 이 기간에는 이메일도 잘 보지 않아요. 이메일을 보내면 대개 ‘저는 8월 00일까지 휴가입니다. 돌아오는 대로 답장 드리겠습니다’ 식의 자동 응답만 돌아와요. ‘빨리빨리’에 익숙한 한국인에게는 속 터지는 일이지만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좀 더 여유 있는 바캉스를 꿈꾸다 


지금은 코로나 시국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여기저기 다니는 것을 가능한 자제하지요. 이게 바캉스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프랑스인의 74%가 여름 바캉스를 떠날 계획이지만 이 중 56%는 프랑스 내에서 보낼 거라고 하니 말이에요. 국외로 가겠다고 응답한 40%도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 비교적 가까운 데로 가려고 한대요. 

프랑스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휴양지는 해안가예요. 해안가는 풍경이 아름답고 해변도 있어서 조용히 쉬기에 안성맞춤이지요. 해안가로 가려면 자동차는 필수품이지요. 자동차 뒤에 카라반(caravane)이라는 간이 이동식 주택을 달거나 아니면 아예 캠핑카를 빌려 여행하지요. 

프랑스인이 여름 바캉스에 쓰는 돈은 한 가구당 2,000유로, 한화로 264만 원 정도입니다. 얼핏 보면 많아 보이지만, 바캉스 기간이 3, 4주라는 점을 감안하면 반드시 그렇게 많은 액수라 할 수도 없어요. 프랑스인은 매달 200유로씩 적립해서라도 여름 바캉스만은 꼭 떠나고 싶어 해요. 그리고 9월이 되면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자기가 다녀온 바캉스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늘어놓지요. 

길어야 1주일, 그것도 전쟁 같은 바캉스로 떠나는 우리로서는 참으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이제 우리도 선진국의 대열에 명실공히 합류했으니 좀 더 여유 있는 바캉스도 보내야 하지 않을까요? 바캉스 기간을 좀 더 늘리거나, 떠나는 시기도 1부, 2부 식으로 나눈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Tip 카라반의 어원은?




카라반은 ‘사막 여행자 무리’를 가리키는 페르시아어 카라완(Karwan)에서 파생한 말이에요. 이 단어는 십자군 전쟁 때 유럽으로 들어가 중세 라틴어 카라바나(caravana)가 되었고 이것이 불어로 들어가 카라반(caravane)이 되었고 다시 영어로 들어가 캐러밴(caravan)이 된 거예요. 그러고 보니 이 단어 자체도 참 많은 여행을 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