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최원형 생태환경 작가, 서울시 에너지정책위원회 시민협력분과 위원
‘에너지의 날’은 에너지의 중요성 및 화석연료의 과다한 사용으로 인한 문제 인식을 높이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에너지 절약에 동참하자는 취지에서 8월 22일로 제정되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가가 오르며 에너지 이슈는 그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폭염으로 추락하는 새
콘센트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요? 가끔 지인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대체로 벽과 복잡한 전선이 있다는 답이 돌아옵니다. 콘센트 너머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게 있지요. 전기를 날라주는 송전탑이 있고 송전탑에서 발생하는 전자파 피해를 입는 인근 지역 주민들의 눈물이 있어요. 원자력발전소에서 발생하는 방사능 폐기물과 오염 문제가 있고 화력발전소에서 배출하는 온실가스가 있지요. 조금 더 멀리 보면 빙하가 빠르게 녹아내리면서 먹을 게 없어 굶주린 채 쓰레기통을 뒤지는 북극곰이 있고, 기온이 올라 눈 대신 비가 내리면서 온통 진흙 범벅이 된 펭귄이 있습니다. 이젠 하늘을 날아가던 새가 떨어지는 풍경이 추가될 것 같습니다.
_45℃의 폭염을 기록하고 있는 스페인 그라나다
올여름 인도의 하늘을 날던 새가 떨어졌어요. 스페인 세비야와 코르도바에서는 부화한 지 얼마 안 된 어린 칼새들이 거리 곳곳에 떨어졌고요. 새들이 맥없이 떨어진 원인은 모두 ‘폭염’이었습니다. 인도는 아직 여름이 시작되기도 전인 3월부터 기온이 오르면서 섭씨 50도가 넘는 폭염이 닥쳤습니다. 견딜 수 없는 폭염에 새들이 탈진해서 떨어졌던 거죠. 칼새는 주로 건물 지붕 아래나 외벽, 첨탑 등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쳐요. 스페인에선 섭씨 40도가 넘는 폭염으로 건물이 달궈지면서 건물 안에 있는 새 둥지까지 달아올랐어요. 날개가 채 돋지 못한 새끼 새들이 오븐처럼 뜨거워진 둥지를 견디지 못하고 벗어나려다 떨어져 죽었고 새 사체가 거리 곳곳에서 발견되었던 겁니다. 칼새의 습성이 초래한 비극이라고 해야 할까요? 오랜 시간 그 지역에서 칼새를 관찰해온 이들에 따르면 여름이 한 달가량 빨라지면서 이런 일이 자주 벌어진다고 해요. 스페인의 칼새 소식은 기후 시스템이 뒤죽박죽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보여주는 끔찍한 사례입니다.
뜨거운 비극의 서막
올여름 유럽은 폭염으로 공항 활주로가 녹아내리고 철로에 불이 붙는 등 기후재난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습니다. 유럽 폭염의 비극은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해 7, 8월 유럽은 1540년 이후 가장 더운 여름이었어요. 최대 7만 명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고 유럽 전역에 걸친 가뭄으로 농업뿐만 아니라 수력발전에도 큰 타격을 주었어요. 폭염이 재난으로 간주되지 않을 정도로 유럽의 여름이 대체로 선선했던 탓에 희생이 컸다고 해요.
북미대륙도 폭염에서 비껴갈 수 없었어요. 그해 8월 14일 오후 뉴욕과 뉴저지, 캐나다의 온타리오와 퀘백에 이르는 동부 지역은 최악의 대규모 정전 사태가 발생했거든요. 3일 동안 계속된 정전으로 5,500만 명이 정전 피해를 봤고 지하철을 포함 뉴욕주 북부를 잇는 통근 열차도 중단되면서 대중교통이 거의 마비됐어요. 택시 요금이 폭등했고 휘발유 가격 역시 급등하며 당시 기준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할 정도였습니다. 정전으로 신호등이 고장 나 도로가 아수라장이 되었고 어둠을 밝히려 켜놓은 촛불로 화재가 발생하는 등 혼란이 야기되었지요. 휴대전화 가입자 대부분이 정상적인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을 정도로 통신도 거의 마비 상태였고 약탈을 막기 위해 가게는 대부분 문을 닫는 바람에 생필품을 구하기도 어려웠다고 해요.
2003년 우리나라는 어땠을까요? 같은 해 8월 22일은 역대 최대 전력 소비량을 기록한 날입니다. 기온이 올라가면서 냉방기 가동률도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대정전이 가져올 사회적 혼란에 경각심을 갖고 에너지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자 한 시민단체에서 이날을 기념해 ‘에너지의 날’을 만들었습니다.
_전력 부족으로 문을 닫은 미국의 상점
그리고 8년 뒤 지역의 전기를 순차적으로 차단하는 순환 정전이 벌어집니다. 한창 야구 경기가 벌어지던 경기장 조명이 갑자기 꺼져 경기가 중단되었고요.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갇히고 은행 업무가 중단되었으며 대학 수시모집 원서 처리가 안 돼 접수 마감일을 하루 연장하는 일이 벌어졌어요. 전국 곳곳에서 사전 예고 없이 벌어진 정전으로 혼란이 벌어진 날은 2011년 9월 15일이었어요. 가을로 접어드는 9월 중순, 점검과 수리를 하려고 몇몇 발전소 가동을 중단한 상태에서 갑자기 늦더위가 찾아왔습니다. 전력 소비량이 급증하면서 예비전력에 비상이 발생하자 블랙 아웃의 위험을 사전에 차단하려 예고 없이 순환 정전을 단행했던 거지요. 전력공급이 중단되면서 혼란이 발생하는 일은 최근에도 있었습니다.
‘양날의 검’, 전기
작년 2월 미국 텍사스에 한파가 닥쳐 발전소가 얼어붙었어요. 한파가 닥칠 건 알았지만 변동성까지 예측할 순 없었거든요. 이것이 기후 위기의 본질입니다. 발전소가 작동을 멈추자 전력공급이 끊겼고 한파로 기온이 뚝 떨어진 상태에서 전기 공급이 중단되자 난방에 문제가 생겼어요. 물건을 실어 올 자동차가 움직이려면 기름이 필요하지만 주유소도 전기 공급이 중단되었고요.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미국 땅에서 사람들이 먹을거리를 사기 위해, 가스를 사기 위해 길게 줄을 선 장면을 보면서 마치 100년 전 사진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어요. 현재 우리의 과학과 기술은 인류 역사상 최정점에 있지만 전기가 끊기자 모든 일이 다 무용지물이 된 거예요. 전기가 없는 우리 문명이 얼마나 허약한 기반 위에 세워졌는지 여러 재난을 통해 여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듯 기후가 정상 범위를 넘어서는 주요 원인은 과도한 온실 가스 배출입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 IPCC가 발간하는 보고서는 가장 많은 온실가스 배출원으로 전력을 생산하는 발전소를 지목하고 있습니다. 석탄화력발전소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전력을 생산하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발전소를 만나는 곳은 콘센트이지만 콘센트에서 온실가스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인간의 노동력을 덜어주던 가축의 자리가 전기로 완벽하게 대체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전기 소비로 인해 전기가 중단되는 아이러니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2020년 여름, 장마 기간을 훌쩍 넘겨 54일 동안 비가 내리자 빨래를 말려주는 건조기 판매가 급증했습니다. 당연히 전력 소비도 증가했을 테고요. 봄, 가을이 짧아진 만큼 여름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에어컨 없이 여름을 나는 일은 이제 상상조차 쉽지 않아요. 그러니 더 큰 용량의 발전소가 또 필요합니다. 이런 삶이 언제까지 지속 가능할까요?
_우리나라 화력발전소
8월 22일 오후 9시의 별
올해도 일찍 여름이 찾아온 데다 기온이 올라가면서 전력수요가 증가하자 순환 정전 가능성을 시사하는 뉴스가 나오고 있습니다. 해마다 에너지의 날이면 오후 9시부터 5분 동안 ‘불을 끄고 별을 켜다’ 행사를 전국적으로 진행합니다. 물론 자발적 참여인데요. 2020년 단 5분 소등했더니 45만kWh에 달하는 전력이 절약되었어요. 석탄화력발전기 1기 발전량이었고요. 전기차 1만 2000대를 동시에 충전할 수 있는 전력량입니다. 에너지 소비는 더욱 거센 기후 재난을 불러오고 그 재난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 많은 전력을 소비하는 동안 인류가 지구에서 생존할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인류 생존은 어쩌면 전기소비와 반비례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에너지 절약이라는 말이 사라진 시대입니다. 가전제품을 1등급으로 바꾸어도 용량이 커진다면 과연 에너지 소비는 줄어든 걸까요? 삶이 단순 소박해지는 길 말고, 소비를 줄이는 길 말고 달리 인류 생존이 지속 가능할 방법이 있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