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지혜 아트 컬렉터, <나는 미술관에서 투자를 배웠다> 저자
사진제공. 위키피디아, 셔터스톡
최근 판화가 높은 투자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제 막 컬렉팅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입문용으로 좋은 판화의 장점과 함께, 판화로 아트테크 할 때의 주의점을 살펴보자.
판화 찾는 컬렉터들의 폭발적 증가
판화란 작가가 직접 제작했거나 제작에 참여한 복제 미술품을 말한다. 판화와 사진, 조각 작품은 원화와 달리 ‘에디션(Edition)’이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이는 한정된 총량으로 인쇄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어 전시 및 판매되는 작품을 가리킨다. 반복해서 찍어내는 에디션의 총 개수와 각 작품의 순번은 분수로 작품의 하단이나 뒷면에 작가의 서명과 함께 표기된다. 예를 들어 7/50 이라면 총 50개의 에디션 중 일곱 번째 작품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판화는 말 그대로 다량 인쇄된 복제품이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원본의 가치를 인정받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러한 판화의 특징이 그 동안에는 한계점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왕왕 존재했다. 컬렉터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판화의 기술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작가의 붓 터치가 그대로 담겨있는 원화가 아니기 때문에 복제품에 불과하다는 선입견으로 컬렉팅을 망설이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판화가 가진 높은 투자가치가 인정받게 되면서 판화를 찾는 컬렉터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원화를 바라보던 눈을 조금 더 낮추면서 작품을 즐길 수 있기 때문에 기성 컬렉터들에게도 인기가 있는 것은 물론, 이제 막 컬렉팅을 시작하는 ‘컬린이’들의 입문용으로 시작하기에 딱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앞으로 소개할 판화의 장점을 살펴보자면 판화가 가진 특성이 아트테크에 안성맞춤이라는 사실에 여러분 역시 동의할 것이다.
_툴루즈 로트레크, <물랑루즈>, 1891. 석판화 포스터
원화보다 수익률 높은 경우도 많아
첫째, 블루칩 작가의 원화는 넘사벽 가격대에 거래되는 데 비해 판화의 가격은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앞서 설명한 기성 컬렉터들이 판화를 찾는 큰 이유를 바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쉽게 설명해 같은 작가가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작품이 억대에 팔리는 동안, 판화는 몇 백만 원대의 몸값에 머무른다. ‘물방울의 정수’ 라고도 알려진 대표적인 한국의 거장 김창열 화백의 작품을 100만 원대에 살 수 있다? 믿을 수 없겠지만 원화 대신 오프셋(offset) 기법으로 제작된 판화를 찾는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이렇게 거장의 작품을 합리적으로 소장할 수 있다면 판화라고 해서 마다할 이는 없을 것이다.
둘째, 가격을 다운사이징한 판화는 원화에 비해 보유기간이 짧다. 작품 소장자들의 보유기간이 짧다는 것은 즉 거래 유속이 상대적으로 빠르다는 것을 가리키며, 이는 곧 높은 환금성과 직결된다. 다시 말해, 원화에 비해 판화는 거래 금액이 그만큼 가벼울 뿐 아니라 구매자의 심리적 가격 저항선까지 낮추는 것이다. 또한 한정된 수량으로 제작된 작품이 여러 점 존재한다는 점도 거래 속도를 높이는 데 한몫하는데, 시세 파악이 수월하고 낙찰가 기록이 빈번하게 남게 되면서 작품을 소구하는 시장 자체가 구축되기 때문이다.
셋째, 작가의 명성이 상승하면 작품의 가격이 상승하기 마련인데, 이때 판화의 가격 또한 동반 상승효과를 누리게 된다. 바로 앞에서 설명했듯 거래의 유속이 원화보다 빠른 판화의 특성 상, 원화보다 총금액은 낮을지언정 수익률 자체는 원화보다 더욱 뛰어난 경우가 많다. 따라서 블루칩 작가의 판화를 이용한 아트테크는 성공이 예정된 투자라고도 할 수 있다.
넷째, 작가의 대표작 및 수작으로 제작된 판화는 원화와 거의 비슷한 정서적인 즐거움을 준다. 판화의 제작 방법과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에디션 넘버와 작가의 서명을 보지 않는다면 원화로 착각할 정도의 정교함을 갖추었다.
한정 생산된 판화의 가치가 높다
그렇다면 판화를 선택함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점은 없을까? 사실 여기서는 주의할 점보다는 판화에 대한 더욱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판화는 그 제작기법에 따라 공판화(실크 스크린), 석판화(모노타이프 혹은 리소그래피), 목판화, 동판화(에칭)등으로 나뉜다. 석판화는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는 원래를 이용해 제작된 판화로, 아무리 많이 찍어도 원판 훼손의 우려가 없다. 그러나 목판화나 동판화의 경우 반복해서 찍을수록 원판의 상태가 나빠져 작품의 컨디션이 떨어질 수 있다. 이에 착안하여 컬렉터들 사이에서는 에디션 넘버가 85번 이하인 것을 고르는 것이 좋다는 의견들이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검토해본 바에 따르면 에디션 넘버에 따라 판화의 가격 차등화가 발생하는 경우는 없었다. 요즘에는 기술 발전에 따라 동판이나 목판으로 판화를 제작하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미술 시장에서 아트테크에 더욱 유리한 판화를 고르는 팁을 살펴보자. 판화는 제작에 앞서 작가와 제작사 또는 갤러리의 협의하에 제작 방식과 에디션의 총 개수가 정해진다. 물론 같은 작가라도 제작할 때마다 개수가 달라진다. 판화의 개수는 희귀성의 척도라고도 볼 수 있는데, 총 개수를 정해두지 않고 대량생산하는 ‘오픈 에디션’ 보다는 소수로 한정 생산된 판화의 시장가치가 당연히 높다.
_(좌)앤디 워홀, <마릴린 먼로>, 1962년, 실크스크린 판화
(우)폴 고갱, <악마의 말>, 1894, 모노타이프 판화
사후 판화보다는 생전 판화를 선택하라
또한 가끔 에디션 넘버 앞에 ‘A.P’라고 적힌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에디션의 총 개수와는 별도로 제작한 작가 소장용(Artist Proof) 작품이라는 뜻이다. 통상적으로 A.P 작품은 에디션 총 개수의 10~15% 이내로 제작된다. 이러한 비율보다 높아지면 에디션으로 명시된 총 수량의 가치를 변동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 한편 ‘P.P’는 프린팅을 담당한 제작자 소장용(Printers Proof)과 선물용(Present Proof)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아시아권, 특히 국내 미술 시장에서는 에디션 작품과 A.P 나 P.P 등의 소장용 작품에 대한 호불호가 컬렉터마다 크게 갈린다는 것이다.
예전 1차 유통 시장에서는 정식 발매된 에디션 작품이 완판된 후 A.P나 P.P 작품들을 조금 더 비싸게 판매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2차 시장으로 넘어간 후에는 에디션 작품을 소장용 작품보다 더 높게 쳐주는 분위기와 웃돈을 주고 구입한 소장용 작품을 더 우위로 두는 상반된 경향이 동시에 나타났다. 개인적으로는 총 개수 안에 포함되는 에디션 작품을 더 선호하긴 하나, 여기에 정답은 없고 각자의 선택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생전 판화’와 ‘사후 판화’의 가치를 따져보려고 한다. 최근 미술 경매에서 작가의 사후 판화가 출품된 것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조금 극단적으로 말해서 작가가 생존할 때 작업된 판화와 사후 판화의 가치는 하늘과 땅 차이다. 생전 판화는 작가가 직접 작업했거나 제작에 참여한 가치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후 판화의 가치가 무조건 떨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작가의 작품을 소장하고 감상하는 의미에서라면 사후 판화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아트테크를 목표로 하고 있다면 생전 판화를 선택하는 것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