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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은 내 운명
소리꾼 남상일

우리 전통의 소리를 꿋꿋이 지켜나가는 동시에 신명 나고 유쾌한 입담으로 남녀노소 불문,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는 국악계의 스타 남상일. 운명과도 같았던 국악과의 첫 만남을 비롯해 지금의 남상일을 만들어왔던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들에 대해 들어보았다.  

 




어린이 위한 창작 판소리 만들겠다  


국악계의 아이돌이라 불리는 남상일은 지난해 44세 나이로 득녀, 늦깎이 아빠가 됐다. 최근 코로나19 거리두기가 완화되면서 공연 및 행사로 몹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마음만은 어린 딸 덕분에 한결 더 여유로워졌다.

“원래부터 긍정적인 사람이긴 했지만 아이로 인해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것 같아요. 요즘엔 딸의 재롱을 보고 싶은 마음에 집에 더 빨리 들어가고 싶어졌습니다. 반면 40대 중반의 늦은 나이에 딸을 얻었으니 그 애와 더 오래도록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건강관리를 잘해야겠다는 책임감도 느끼고 있지요.”

집에서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면서 같이 노는 것이 이제 그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행복이 됐다. 그러다 보니 아이에게 들려줄 재미있는 창작 판소리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다. 예전에 한번 ‘노총각거시기가’라는 창작 판소리를 만든 적이 있었다. 농촌 총각이 장가를 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으로, 현대사회를 풍자한 스토리가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춘향가, 심청가 같은 판소리는 참 재미있고 좋은 음악인데 우리 동시대의 이야기는 아니잖아요. 그래서 현대의 우리가 일상에서 겪을 법한 이야기를 창작 판소리로 만들어 아이들에게 들려주면 국악과도 더 친해지고 정서적으로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른들은 국악이 지루하거나 슬프기만 하다는 편견을 갖기 쉬우나 아이들에겐 그런 편견이 없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국악을 접하고 즐기게 되면,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국악을 스스로 찾아서 듣게 될 것이라는 것이 그의 기대이다. 그가 내놓을 ‘어린이를 위한 창작 판소리’는 내년도쯤이면 세상에 선보이게 될 전망이다. 



남달랐던 국악과의 첫 만남 


남상일 또한 그의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국악을 접하게 됐다. 어렸을 때 그는 보통 아기들보다 훨씬 더 자주 울었다고 한다. 아기가 계속 우니까 병원을 데려가 봤지만 아무 이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아버지가 TV에서 우연히 국악 프로그램을 틀었는데, 브라운관에서 당시 최고 명창이었던 조상현 선생의 판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듣고 어린 남상일이 울음을 뚝 그치고 TV 앞으로 다가가서 아주 집중해서 보더란다. 이를 범상치 않게 여긴 아버지는 그에게 계속 판소리를 들려주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곧잘 그 판소리를 따라했다. 

“아버지는 제 판소리를 테이프에 녹음해 편지와 함께 조상현 선생님께 보내셨어요. 그러자 선생님이 그걸 듣고 ‘이 아이는 소리를 할 아이니까 배우게 하면 좋겠다’는 답장을 보내셨대요.”

그때부터 아버지와 조상현 명창의 판소리 영재교육이 시작됐다. 명창이 판소리 대목 일부를 녹음해서 보내주면 남상일이 익혀서 따라서 불렀고, 그것을 아버지가 녹음해서 명창에게 보내 피드백을 받는 식이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전주의 명창, 조소녀 선생으로부터 소리를 배웠다. 요즘은 어릴 때부터 국악을 배우는 아이들이 많지만 당시만 해도 국악은 어른들이나 하는 것이었지 조기교육의 개념이 없었다.

“그런데 저는 다른 친구들이 장난감 사달라고 할 때 북이나 장구를 사달라고 했대요. 그러니 어른들이 신기해하면서 조기교육을 시키신 것이죠. 그날 TV에서 조상현 명창의 소리를 듣고 이렇게까지 흘러온 것도 보면 전 소리를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스승의 발자취를 뒤따라 걷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국악 영재교육을 받은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 후 최연소로 국립창극단에 입단했다. 국립창극단은 판소리뿐만 아니라 춤, 연기까지 골고루 다 잘해야 들어갈 수 있는 이른바 국악계 최고 고수들의 집단이다. 그런 곳에 최연소로 들어간 것도 놀랍지만 최단기로 주역에 발탁되면서 판소리 다섯 마당인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적벽가, 수궁가의 주역을 다 맡았던 것도 보수적인 국립창극단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가 이렇게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데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시절 만난 스승 안숙선 선생의 가르침 덕이 컸다.

“선생님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국악계의 대스타이자 제 롤 모델이셨어요. 선생님은 판소리를 종교처럼 여기고 사셨던 것 같아요. 항상 목 관리를 하며 절제하는 삶을 사셨고 ‘절대 남 얘기 하지 말고 네 할 것만 열심히 하라’고 가르치셨죠. 예술적으로도 훌륭하시지만 삶 전반에서 배울 것이 정말 많고 존경스러운 분이셨어요.”

그는 스승이 우리 국악을 알리기 위해 많은 사회활동도 하면서 제자 양성에 힘쓰는 모습을 보며 본인도 그 길을 따라 걷고자 결심했다. 그래서 그에게 많은 명성을 안겨주었던 창극단을 떠나 국악을 더 많은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이후 그는 타고난 입담과 유쾌한 매력으로 ‘불후의 명곡’, ‘복면가왕’, ‘황금연못’ 등 다양한 방송에 출연하며 국악계의 아이돌로 올라섰으며, 전국 팔도를 누비며 다양한 무대를 통해 우리 전통음악의 매력을 대중에게 널리 알렸다. ‘한국방송대상 문화예술인상’ ‘문화체육관광부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한류문화 공헌 대상’ 등 수많은 수상경력이 그의 노력을 방증한다. 

 

 

국악계 더 많은 스타 탄생을 바라며


그런데 모든 것이 순탄하게만 흘러왔을 것 같은 그의 인생에도 큰 시련은 있었다. 그것은 그의 국악 인생에서 가장 큰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부친이 작고하셨던 일이었다. 어떻게든 부친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부친이 돌아가신 후 한동안은 무대에서 겉으론 밝은 모습을 보이면서도 속으로는 슬픈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고 한다. 

“그때 깨달은 것이 인명은 재천, 인생은 제가 계획한 대로,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절대 아니라는 점이었어요. 그래서 앞날의 계획을 세우기보단 지금 바로 이 순간 최선을 다하자는 식으로 인생의 모토가 바뀌었죠.”

그렇게 매순간 최선을 다하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다 보니 어느덧 힘든 시기를 극복할 수 있었고 날이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됐다고. 

지금 그가 가장 최선을 다해 이루고 싶은 일은 국악인 후배 양성에 힘써 제2, 제3의 남상일이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도 실력 있는 후배들이 많긴 하지만 국악계에서 더 많은 스타들이 나올수록 더욱 탄탄한 국악 마니아층이 형성될 것이다. 그의 바람대로 우리 국악을 더욱 많은 사람들이 즐기면서 국악계의 저변이 한층 더 확대되는 데 그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을 기대해본다. 

 

발문)

“다른 친구들이 장난감 사달라고 할 때 저는 북이나 장구를 사달라고 했대요. 어릴 적 조상현 명창의 소리를 듣고 이렇게까지 흘러온 것도 보면 전 소리를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나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