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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과 노래,
한길을 걷다
성악가 엄정행

화려한 기교 없이도 듣고 나면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 노래가 있다. 사람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듯 친근하게 다가가는 노래. 평생 그런 노래를 부르기 위해 노력해왔다는 성악가 엄정행을 만나보았다.

 

평생 모은 자료, 모두에게 도움 되길


최근 언론 매체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엄정행을 만난 곳은 양산시에 위치한 쌍벽루아트홀이었다. 이곳에는 오는 7월 중순 ‘엄정행 소장품 전시관’이 개관할 예정이다. 지난 3년간 헌신했던 울산예술고등학교 교장직도 올 2월에 사퇴했고 현재는 이 전시관 준비에만 열정을 쏟고 있다.

“요즘엔 공연도 안 하고 방송 출연도 안 한 지 오래되니까 ‘엄정행이 죽었나?’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웃음) 아직도 여기저기서 요청이 들어오긴 하지만 이제 체력도 딸리고 요즘 잘하는 젊은 후배들에게도 기회를 줘야 하니까 고사를 했어요. 또 스스로 제 노래가 마음에 차질 않으니까 이제 무대에 서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도 있죠.”

그는 전성기 때 20년 동안은 거의 매일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독창회만 197회 했고 하루에 두 번씩 공연한 적도 있다. 그러나 완벽주의적인 성격 때문에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하자 50세 이후론 방송 출연을 접었다. 그동안 쌓아온 인연을 무시할 수 없어서 꼭 필요한 공연에만 나갔는데 그것도 75세 이후론 그만두고 이후로는 교육자로서 후진 양성에만 전념해왔다. 

그가 평생 모아온 소장품을 선보이게 될 ‘엄정행 소장품 전시관’은 그랜드피아노 2대, 오디오, 스피커 등을 설치해 전시, 공연 등을 즐길 수 있는 음향 공간, 책, 레코드, LCD, 희귀 악보 등을 볼 수 있는 전시 공간, 음악 공연 영상을 감상할 수 있는 영상 공간 등으로 꾸며질 예정이다. 

“이탈리아에서 유학을 하셨던 제 은사 교수님이 돌아가시면서 유럽에서 수집한 희귀한 자료들을 저에게 많이 물려주셨어요. 또 45년간 교수 생활하면서 해외에만 나가면 음악 관련 자료들을 구하느라 많은 곳을 돌아다녔죠. 성악가 중 유명 테너들의 CD만 해도 100장이 넘어요. 이런 자료들이 음악 공부하는 젊은이들과 시민들에게 도움이 되고 즐거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곡으로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 누려 


엄정행이 성악가로 우뚝 서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청소년 시절에는 배구 선수를 꿈꾸며 운동만 했었다. 그런데 배구 시합 경기 방식이 9인조에서 6인조로 바뀌면서 174cm의 비교적 작은 키가 그에게 불리한 요소로 작용했다.  

“결국 그런 변화에 적응할 수 없어 배구 선수의 꿈을 포기하고, 음악 선생님이었던 아버지의 권유로 대학입시 한 달을 앞두고 갑자기 성악으로 진로를 변경하게 됐죠.”

그렇게 음대에 진학했지만 가정 형편 때문에 유학은 꿈도 못 꿨다. 대신 성실히 음악 공부를 하며 대학원까지 마쳤다. 그러나 졸업 후에도 입신양명의 기회는 얻지 못하고 무명 성악가로 남아야 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옷 장사, 커피숍, 악기 장사 등 다른 일을 하다가 청주여자사범대에 전임강사 자리를 얻으면서 겨우 경제적인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던 그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다. 

“1972년 MBC FM라디오에서 우연히 우리 가곡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았어요. 당시 성악가들의 음반은 SP레코드, 즉 모노로 녹음된 것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거긴 FM이니까 스테레오로 가곡을 새로 녹음해서 틀어줬거든요. 가곡 ‘비목’을 작곡한 장일남 선생님이 그 녹음을 주도했는데 그 분을 찾아가서 다짜고짜 저도 녹음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졸랐죠.”

장일남 선생은 그 노력이 가상해서 무명 성악가였던 그에게 한 곡만 부르게 했다. 그러나 막상 노래를 시켜 보니 기대 이상으로 잘 불렀고, 방송국 측의 반응도 좋아서 12곡이나 녹음을 하게 됐다. 그 곡들을 토대로 ‘테너 엄정행 한국가곡집’ 앨범이 나왔고 그것이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엄정행은 하루아침에 국민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고음질 음악방송에 특화된 FM라디오의 태동, 한국 가곡 붐이 일기 시작하던 무렵의 희귀한 스테레오 음반이라는 행운도 따라주었지만 그의 뛰어난 음악성이 없었다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끊임없는 공부와 연습의 길 


왜 우리 국민들은 많은 성악가들이 부른 가곡 중에 특히 엄정행이 부른 것을 ‘가곡의 정석’으로 인정하고 사랑하게 됐을까. 이는 그가 외국 유학을 다녀오지 않은 순수 국내파로서, 우리 노래 가사에 담긴 정서, 발음, 발성법 등에 대해 엄청난 공부와 연습을 한 덕분이었다. 

“한국어 발음은 어렵기가 세계적으로도 유명합니다. 우리 노래 가사에 담긴 고유의 정서를 정확한 발음과 억양으로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많은 훈련이 필요하지요. 국악 명창들이 어릴 때부터 피나는 연습을 하는 것도 그 이유에서입니다. 저는 우리 가곡을 잘 부르기 위해 판소리 명창이신 조상현 선생님을 찾아가 우리 소리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이와 함께 그는 ‘구름을 타고 간다.’라는 노래 가사 한 구절을 불러보며 그중 ‘타고’의 ‘타’ 한 글자를 어떻게 발음하느냐에 따라 노래가 어떻게 완전히 달라지는지를 즉석에서 시범을 보여줬다. 그는 단 한 구절을 부르더라도 가사의 뜻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청중들의 가슴에 여운을 남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목련화’는 처음 선보이기 전, 연습 중에 60번이나 고쳐 부른 일화로 유명하다. 

 

음악을 위해 인생을 희생하지 않아


유명해진 후에도 그는 초심을 잃지 않고 겸손하고 소탈한 성품으로 높은 인기를 얻으며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다. 세종문화회관, 예술의전당 같은 큰 무대뿐만 아니라 탄광촌, 어촌 등도 가리지 않았다.  

“제가 한창 공연을 다녔을 때는 우리나라 도로 사정이 열악해서 아스팔트길을 별로 못 다녀봤어요. 음악 전문 공연장도 드물어서 극장이나 시민회관 같은데서 연주했죠. 시골 어르신들이 엄정행 얼굴 한 번 보자고 그렇게 많이들 와서 좋아해주셨어요. 참 정이 많던 시절이었죠.”

그는 음악을 하는 후학들에게 돈이나 명성에 얽매이지 말라고 조언한다. “노래만 잘한다고 해서 절대 출세할 수 없다. 음악을 사랑하는 청중들과 소통할 줄 알아야 한다. 실력 이전에 인성이 먼저 갖춰져야 음악을 꾸준히 할 수 있다.”고. 

“저는 음악을 위해 인생을 희생하지 않았습니다. 돈을 쫓아서 원치 않는 무대에 서본 적도 없고, 유명한 성악가랍시고 사람들 앞에서 거만하게 굴지도 않았습니다. 주최 측 형편이 어려워 보이면 개런티를 받지 않고 무대에 서기도 했지요. 그러니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든 마음이 편하더군요.”

현재 그는 고향인 양산시에서 ‘엄정행음악연구소’를 열어 여성합창단을 지도하고 있으며, 매년 우수한 신인 성악가를 발굴하는 ‘엄정행 콩쿠르’를 개최하고 있다. 지난 2년간은 코로나19 때문에 콩쿠를 개최하지 못했으나 내년부터는 다시 시작할 계획이다. 

성악가 엄정행은 평생 동안 음악과 인생 어느 한 쪽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 가곡 대중화에 기여한 뛰어난 음악가이자, 후학들에게 삶의 본보기가 된 훌륭한 교육자로 오래도록 우리 기억에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