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 : 충북보은전통공예체험학교, 스타벅스코리아
멀리서 보면 평범한 수묵화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뭔가 다른 느낌이다. 도구는 달랑 인두 세 개. 색깔도 하나뿐이지만 산, 바위, 초목, 호랑이 등 삼라만상을 자유자재로 표현해낸다. 은은하기도 하고 강렬하기도 하고 개성이 넘치는 낙화의 세계. 그 중심에 낙화장 김영조가 있다.

낙화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김영조 장인의 모습
5백년 역사를 가진 전통예술, 낙화
벌겋게 달궈진 인두가 종이 위를 지나간다.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빠르게. 마치 춤추듯 막힘이 없는 낙화장의 솜씨에 따라 인두 끝에 하얀 연기가 피어나면서 종이 위에는 어느새 산, 바위, 국화, 대나무 등이 새겨진다. 이렇듯 낙화(烙畵)는 불에 달구어진 인두로 종이나 섬유, 나무, 가죽 등의 표면을 지져서 산수화, 화조화 등의 그림이나 문양 등을 표현하는 우리나라의 전통 예술이다.
낙화의 역사에 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없다. 오래 전 중국에서 처음 건너와 서민들과 부녀자 사이에서 널리 전파되다 1820년 박창규라는 유명한 낙화장의 등장으로 크게 유행하게 된다. 하지만 박창규 명인의 작고 후밀양 박씨 가문에서만 가업으로 이어져오다가 대중과는 멀어지게 됐다.
5백여 년의 역사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전통예술로 인정받지 못했던 낙화를 우리나라 대표 문화재 반열에 올린 이가 있다. 지난 2018년 국가무형문화재 136호로 지정된 국내 유일의 낙화장, 김영조 장인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김영조 장인은 20대 때 일찍 아버지를 여읜후 일자리를 찾던 중 우연히 신문에서 ‘낙화 수강생 모집, 취업도 가능’이라는 광고를 보고 낙화의 세계에 입문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상상하고 보고 그리는 걸 즐겨했어요. 저희 스승이신 전창진 선생이 인두로 종이를 지져 동양화, 산수화 등을 그리는 모습을 보고 신세계를 발견한 느낌이었죠. 낙화가 그려지는 과정을 보자마자 난 이것을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산도(夏山圖), 186cm×70cm, 전통한지
하나의 예술 장르로 인정받기까지
낙화를 익히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최소 20년 동안 수련해야 튼튼한 밑바탕을 마련할 수 있다고 한다.
“30평 남짓한 공간에서 10개가 넘는 숯불을 피우고 그림을 그렸어요. 한여름엔 온도가 50도 넘게 올라갔죠. 인내심 없인 할 수 없는 작업인지라 40명이 넘었던 수강생은 10명으로 줄었고 결국 낙화연구소도 문을 닫았어요.”
하지만 그는 낙화를 그리는 인두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생계를 위해 각종 관광지에서 기념품을 제작·판매하며 전통 낙화 기법을 이어왔다. 낙화를 그린 지 십수 년 뒤, 그는 잘 운영되던 기념품 가게를 정리하고 자신만의 낙화연구소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낙화 작업에 몰두했다.
그의 낙화 작품은 운보 김기창 화백에게도 극찬을 받았 으나 한편으론 각종 국전, 전시회에서는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였다. 하나의 예술 장르로 인정을 받지 못해서였다.
그는 오랫동안의 자료 수집, 학자들과의 교류 및 연구 등을 통해 낙화를 하나의 예술 장르로 인정받게 하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2007년 전승공예대전에서 특선을 차지한 데 이어 중국 상하이, 이탈리아 아솔로 비엔날레, 태국 동아시아문화도시특별전 등 해외에서 많은 시연을 진행하며 낙화를 널리 알렸다. 마침내 2018년, 대한민국은 그를 무형문화재 136호에 지정하게 된다.

맹호도(猛虎圖), 91cm×148cm, 전통한지
담백하면서도 미묘한 낙화의 매력
낙화는 오직 한 가지 색으로만 표현된다. 인두와 불을 다루는 숙련된 손놀림과 미묘한 농담을 표현하는 기술이 낙화의 예술성을 결정짓는다. 열과 인두의 강약에 따라 색이 검어지기도 하고 갈색을 띄기도 한다.
낙화는 종이 외에도 나무, 비단, 가죽 등 불에 타는 것이 라면 어느 것이든 캔버스로 활용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낙화는 회화인 동시에 공예의 면모도 갖추고 있다. 특히 한지를 그을리면 나오는 특유의 갈색은 단조로운 듯하면서도 깊이가 있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낙화의 작업 과정은 일반 회화보다 훨씬 더 어렵다. 작품을 구상한 후 스케치하는 데까지는 여느 회화와 같다. 하지만 이후의 작업 방식은 전혀 다르다. 먼저 화로에 고품질의 참숯을 올린 후 풍로를 돌려 불을 피운다. 인두를 달구기 위해서다. 인두는 점과 선을 그릴 때 사용하는 앵무부리인두 한 개, 그리고 넓은 면을 표현할 때 쓰는 평인두 두 개가 한조이다.
“낙화는 한 작품을 그리는 데도 상당히 긴 시간이 걸립니다.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서 특선을 차지한 작품 <강산무진도>는 완성까지 꼬박 1년이 걸렸습니다. 이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 작품을 완성했을 때의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신악경림도(神岳瓊林圖), 60cm×130cm, 전통한지
끝까지 가보자는 정신으로 여기까지
낙화는 우리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에 얼마든지 맞출 수 있다. 예를 들어 그가 2015년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에서 시연한 작품 <視(See)>는 사진인지 낙화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정교함을 자랑한다. 또지난 2018년에는 스타벅스코리아와 함께 주미대한제국공사관 헌정 텀블러에 낙화 작품을 넣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김영조 장인은 “어려웠던 시기에 우리 민족의 애환을 간직한 건물인 만큼 주미대한제국 공사관 건물을 소박하면서도 깊이 있게 표현하고자 했고, 그 어떤 회화보다 낙화와 잘 어울리는 작품이 된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국가무형문화재가 된 것은 끝이 아니라또 다른 시작이라고 말한다. 죽을 때까지 우리 전통 낙화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자신의 짐이자 의무라는 것이다.
“장인은 미련해야 합니다. 미련하지 않으면 절대 장인이 될 수 없습니다. 약은 사람은 이익과 편리성을 찾아 떠나지요. 저도 20년 정도 됐을 때 굉장히 갈등을 했습니다. 희망도 없고 명예나 돈도 없는데 내 일생을 걸어야 하나 고민했지요. 그런데 그동안 걸어온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끝까지 가보자 한 것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한때 명맥이 끊어질 뻔했던 낙화를 세상에 다시 널리 알리고, 젊은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커피 프랜차이즈의 텀블러에까지 낙화를 새겨 넣은 김영조 장인. 그의 손에 쥐어진 시뻘건 인두 끝에서 또 어떤 멋진 예술세계가 펼쳐질지 자못 기대된다.

스타벅스 텀블러에 새겨진 ‘주미대한제국공사관’ 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