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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와 나,
얼마나 가까운 사이일까?

2월 셋째 주 일요일은 ‘세계 고래의 날’이다. 포경을 금지하는 등 국제적인 노력 덕분에 개체 수가 증가한 고래도 있다. 하지만 기후변화, 서식지 파괴, 해양 플라스틱 쓰레기 등이 고래를 위협하는 새로운 천적으로 떠오르고 있다. 우리의 삶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고래를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글. 최원형 생태환경 작가, 서울시 에너지정책위원회 시민협력분과 위원 

 

제돌이, 고향으로 돌아가다

 

몇 년 전 여름, 우연히 들렀던 서귀포 어느 바닷가의 기억입니다. 8월 한여름이었는데 종일 쏟은 땀을 얼른 씻고 싶기도 했고 배도 고팠던 터라 하루 일정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숙소로 돌아가던 길이었어요. 일행 중 누군가가 돌고래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말에 그만 솔깃해서 방향을 틀어 바닷가로 향했습니다. 한 시간쯤 흘렀으려나요. 바다는 물결만 일렁일 뿐 잔잔했어요. 

 

기다리다 지쳐 하나둘 일어서려는 찰나 ‘엇, 저기!’ 누군가가 소리쳤고 일행은 그가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여기저기서 등지느러미와 꼬리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자유로이 유영하는 돌고래가 떼를 지어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어요. 가끔 수면 위로 솟구치며 호를 그리기도 했고요. 바다가 살아있다는 것을 아주 생생하게 경험한 날이었습니다. 돌고래를 떼로 만났던 그곳은 ‘제돌이’의 고향입니다. 서울대공원 수족관에 갇혀 지내던 남방큰돌고래 제돌이가 시민들의 노력으로 2013년 제주 앞바다로 돌아갔습니다. 어망에 걸린 돌고래는 방사하는 게 원칙인데도 불법으로 유통시켜 쇼에 동원되었거든요. 그 후로 수족관에 갇힌 돌고래들이 잇따라 야생으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쇼에 동원되고 수족관에 갇혀 시름시름 앓다 죽어가는 돌고래도 있습니다. 

 

어망에 얽혀 희생된 고래
 

고래의 다양한 쓰임새, 오히려 멸종 위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래사냥 암각화는 울주군 반구대에 있습니다. 선사시대 유물은 인류가 오래 전부터 생활에 필요한 많은 것을 고래에게서 얻으며 살아왔다는 걸 보여주지요. 고래는 두꺼운 피지층에 기름을 대량으로 저장합니다. 석유를 본격적으로 채굴하기 전까지 고래 기름은 등잔을 밝히고 연료로 널리 활용됐습니다. 향유고래에서 얻는 경랍은 왁스, 양초, 화장품을 만드는 원료였고요. 고래 가죽으로 옷이나 신발을, 뼈는 여러 도구를 만드는 데 쓰였어요. 이렇듯 다양한 쓰임새는 고래에게 치명적인 시련이기도 했어요.

 

고기와 기름, 뼈 등 삶에 필요한 것을 얻던 포경이 폭발물을 사용하는 작살, 엔진과 대포를 장착한 초대형 상업 포경으로 발전합니다. 이윤이 목적인 포경으로 옮겨가면서 고래 숫자는 급감합니다. 이 사실을 국제사회가 인지하기 시작한 건 20세기 초였어요. 고래가 처한 상황을 인식하고 멸종할지도 모를 종을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협약, 국제법 등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1930년 6월 국제연맹이 베를린 회담을 시작으로 ‘포경 규제를 위한 협약’ 초안을 만드는 등 남획을 규제하려는 노력이 있긴 했어요. 그렇지만 규제가 있어도 허점은 늘 있었던 것 같아요. 1986년부터 전세계적으로 포경이 금지됐어요. 그렇다면 고래 숫자는 늘었을까요? 포경 금지에 이의를 제기하는 나라도 있고 연구 목적의 포경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여전히 상업 포경을 계속하고 있는 나라도 있어요. 

 

일본은 2019년 국제포경위원회를 탈퇴하면서 상업 포경을 재개한다고 발표했고요. 그런데 포경뿐만 아니라 고래를 위협하는 새로운 천적들이 등장하면서 고래는 여전히 멸종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기후변화, 서식지 파괴, 남획, 어망으로 인한 부수적 어획, 독성물질 오염 그리고 늘어만 가는 해양 플라 스틱 쓰레기가 바로 고래를 위협하는 새로운 천적입 니다.


해변의 쓰레기를 줍는 비치 코밍 활동
 

건강한 생태계의 필수요소, 고래 

 

2016년 범고래 사체가 영국 스코틀랜드 해안가에 쓸려옵니다. 부검 결과 몸에서 폴리염화비페닐(이하 PCB) 농도가 기준치보다 100배나 높게 검출되었어요. 이 범고래는 영국에 마지막으로 남은 정주형 범고래 9마리 가운데 하나였어요. 그동안 범고래들이 새끼를 낳지 못한 이유가 PCB 때문일 수도 있지 않느냐는 의문이 제기되었고요. 그 바다에서 나오는 생선과 어패류를 먹는 영국민들은 안전하냐는 질문도 쏟아졌지요. 

 

2018년 2월 스페인 남쪽 한 해안에서 향유고래 사체가 발견되었어요. 부검한 고래 위와 장에서 비닐봉지, 그물, 병뚜껑, 석유통 등 플라스틱 쓰레기가 가득 차 있었는데 무게가 29kg에 이르 렀어요. 입을 벌려 바닷물을 빨아들인 후 걸러진 것을 주로 먹고사는 고래는 해양쓰레기 증가에 치명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고래는 바다 생태계와 육상 생태계를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입니다. 해수면에 서식하는 식물성 플랑크톤은 광합성을 통해 스스로 양분을 만듭니다. 이를 동물성 플랑크톤이 먹고 크릴을 비롯한 작은 해양생물이 동물성 플랑크톤을 먹으면서 영양분은 해수면에서 점차 아래로 내려가지요. 100m 이상 깊은 바다에서 먹이활동을 하는 고래가 이렇게 내려간 양분을 위로 끌어올리는 펌프 역할을 합니다. 수면으로 올라와 배변을 하면서 고래똥에 함유된 여러 물질이 해양 생태계를 풍부하게 만듭니다. 고래 똥 속 철분은 식물성 플랑크톤 생성을 돕는데, 식물성 플랑 크톤이 많아지면 광합성을 하면서 탄소를 흡수하게 되니 탄소저장고 역할을 합니다. 

 

식물성 플랑크톤이 1% 증가하면 나무 20억 그루가 탄소를 흡수하는 정도의 효과가 있다는 연구도 있어요. 고래 똥에 들어 있는 인(P)은 식물 생장과 결실에 중요한 물질인데 고래 똥을 먹은 바닷새와 어류 등을 통해 인이 육지로 이동하는 역할을 합니다. 육지에서 인이 점점 고갈되면서 농업이 비료에 의존하는 정도가 증가하고 있어요. 그 이유 가운데 하나로 고래를 비롯한 대형 동물이 지구에서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과학자들은 한목소리를 냅니다.

 

하와이의 마우이 섬에서 관광객들이 혹등고래를 구경 중.
 

비치코밍으로 고래를 보호하자 

 

2월 셋째 주 일요일은 ‘세계 고래의 날’입니다. 알래 스카 일대에 서식하는 혹등고래는 해마다 2월이면 따뜻하고 먹이가 풍부한 하와이 제도로 내려와 새끼를 낳고 기릅니다. 특히 마우이 섬 일대는 혹등고래가 주로 찾는 곳으로 세계적인 고래 관광지이면서 고래를 보전을 위해 노력하는 곳이지요. 고래의 날도 1980년 마우이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육지에 사는 우리가 고래를 보호할 방법은 뭐가 있을까요?

  

포경금지조약에도 불구하고 무분별한 남획을 당하는 고래
 

어느 해변이든 가리지 않고 쓰레기가 널려있어요​. 해변에 있는 쓰레기는 잠재적인 해양쓰레기입니다. 비치코밍이라고 해변을 뜻하는 비치와 비질을 한다는 코밍이 합쳐진 말인데요. 바다로 떠내려가기 전에 얼른 거둬들여야겠지요. 플라스틱 소비를 줄이는 것이 고래 목숨을 살리는 더 근원적이고 중요한 실천입니다. 건강한 해양 생태계를 지키는 일이 곧 탄소중립입니다.

가끔 서귀포 앞바다에서 제돌이 소식이 들려옵니다. 등지느러미에 숫자 1이 적힌 제돌이를 혹시 만나게 된다면 꼭 안부 전해주세요. 잘 있느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