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끊어졌던 조선 찻사발의 명맥이 4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 이어졌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우직하게 가마 곁을 지키고 있는 민영기·민범식 도예가의 손길 끝에서 우리 민족의 예술혼은 다시 말쑥한 얼굴을 드러낸다.
자료제공 : 산청요
무기교의 아름다움, 조선 찻사발
이도다완이라 불렸던 조선 찻사발은 일본에서 지금도 국보로 대접받는 명품 도자기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일본 지배층 인사들 사이에서는 이도다완을 손에 넣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 최상품은 쌀 5만 석에도 거래될 정도였다. 당시 대마도 연간 쌀 수확량이 2만 석이었던 걸 감안하면 엄청난 가치였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임진왜란은 이 찻사발을 확보하기 위해 벌어졌다는 말까지 있다.
조선의 찻사발이 가진 아름다움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완벽을 넘어선 불완전함’이다. 우선 형태적으로는 정확한 균형을 벗어난 약간의 비대칭성이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흙 알갱이가 보이고 색 처리도 얇게 되어 있어 대충 만든 것처럼 보여도 자세히 보면 깊은 매력이 느껴진다. 평범함 속에 묻어나는 고귀한 아름다움. 그것이 일본인들이 숭상해 마지않았던 조선 찻사발의 ‘무기교의 아름다 움’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임진왜란이 일어나 많은 조선의 도공들이 일본에 끌려가 돌아오지 못했고, 조선 찻사발의 명맥도 끊기고 말았다. 이 조선 찻사발의 신비에 매료되어 현대에 되살리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이가 있으니 바로 도예가 민영기, 민범식 부자(父子)이다.
하늘만큼 대단한 선조들의 작품
민영기 도예가는 1973년 국가 장학생으로 일본에 유학을 떠났는데, 이는 명맥이 끊어진 우리나라 전통 도자기 기술을 다시 부활 시키기 위한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그는 당시 일본에서 국보급 도자기 명인으로 추앙 받던 나카자토 무안(中里無庵)이라는 스승을 만나 도자기를 배우게 됐다. 그 스승 또한 알고 보니 임진왜란 때 잡혀간 조선 도공의 후손이었다.
그로부터 5년 뒤, 민영기 명인은 귀국하여 경남 산청에서 자신만의 작업장을 열고 도자 기를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작업터인 ‘산청요’ 자리는 원래 15~16세기 조선 도공들이 많은 도자기를 제작했던 도요지였 다. 또 10년 후, 그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스승의 배려로 처음 진품 조선 찻사발을 만져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 순간 그는 운명처럼 조선 찻사발에 매료되었다.
“일본에 있을 때부터 이도다완을 제대로 만들어 일본인들의 기를 꺾어버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짬짬이 만들어오긴 했어요. 하지만 이걸 본격적으로 만들려고 해보니 그 깊이가 너무 깊은 거예요. 과거 우리 선조들은 하늘 만큼 대단한 걸 만들었어요.”
이도다완은 언뜻 만들기 쉬워 보여 한때는 아무렇게나 만든 ‘막사발’이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실제로 만들려고 해보면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많은 도예가들이 절감한다. 직접 만들어보고, 알면 알수록 조선 찻사발에는 끝없는 매력이 있다고 말하는 민영기 도예가. 그는 선조들이 만들었던 방식 그대로 그것을 재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탐구했고 하루에 300개가 넘는 찻사발을 만들었다가 부수기도 했다고 한다. 그 고생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다.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그가 하나의 찻사발을 만들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차로 30분 넘게 가야 하는 주변 산에서 캐온 백토를 숙성 시켜 다시 발로 밟고 이겨서 도자기 재료를 만든다. 그걸 가지고 물레로 1차 성형을 한 후 다시 깎아내고 그 위에 자신이 만든 유약을 입히고 말려 흙가마에 넣는다. 가마에 불을 때는 데만 꼬박 하루가 걸리며, 일단 도자 기가 완성되기까지 불의 온도를 조절하며 불의 모양을 살피느라 가마 곁을 며칠 동안 떠나질 못한다. 최종적으로 도자기를 완성하는 것은 ‘불의 심판’이다. 걸작은 인간과 자연의 합심이 이뤄낸다. 이런 과정을 거쳐 비로소 작품 하나가 탄생한다.
조선 찻사발을 재현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서서히 세상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일본 에서만 아홉 차례 개인전을 열어 큰 화제를 모았다. 특히 일본의 전 총리였던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그의 열렬한 팬이 됐다. 호소카와 전 총리가 네 번이나 산청요를 방문해 그에게서 도예를 배웠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2015년에 열렸던 전시회 도록에 서문을 썼던 하야시야 세이죠 전 도쿄국립박물관장은 그의 작품을 두고 이렇게 평했다.
“일본 도예가들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조선 찻사발이 가진 그 조형의 묘(妙)를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해 좋은 다완을 제작하지 못했다. 하지만 민영기 씨는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피가 작용했는지 언젠가부터 비범한 다완을 제작하게 됐고 놀라울 정도의 뛰어난 기술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끝없는 예술의 길
현재 민영기 도예가의 곁에는 그의 아들 민범식 씨가 든든히 지키고 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 곁에서 도자기를 만드는 작업을 지켜 봐왔던 그는 도자기 만드는 일이 자신의 적성에 잘 맞는다고 느껴서 대학 전공도 도예과를 택했다고 한다. 아버지를 스승으로 두고 곁에서 일한지도 이제 어언 20년째다. 그동안 각종 공모전에서 수상했으며 개인전도 열었다.
민범식 도예가의 작품 ‘분청사각선문기’는 원통 모양의 반죽을 때려 8면을 만든 후 4각 으로 깎는 성형을 거쳐 대칼을 이용해 표면에 무작위한 무늬를 만들었다. 이를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하게 만든다. 그는 ‘민영기의 아들’, ‘민영기의 제자’라는 수식어를 벗어나 자신만의 색깔을낼 수 있는 작품을 선보이고 싶다고 말했다.
민범식 도예가는 다소 힘들지만 재미있게 즐기며 가업을 잇고 있다며, 우리나라 전통 도자기의 명맥을 이어가는 이 길을 선택한 데 후회는 전혀 없다고 한다.
한편, 민영기 도예가는 아직도 자신이 만든 작품에 만족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만족을 못 하기 때문에 지금도 옛날과 똑같이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고, 만들고, 살펴보고, 부수고 하는 것이지요. 흙과 유약에 대해서도 조금 더 깊이 연구하고 실험해야 해요. 학문과 예술은 끝이 없습니다. 제 명이 다하는 그 날이 끝이지요.”
그는 자신의 대에 조선 찻사발의 신비를 다재현하지 못하면 아들이 대를 이어 완성해줬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밝혔다. 부자(父子)가 대를 이어 밤낮으로 도자기를 빚고, 굽고 있는 산청요. 그곳에서 우리나라 전통 도자기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활짝 꽃피어 전 세계 인들이 도자기를 그곳으로 배우러 오는 날이 오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