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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밤은 지고 새 날이 꽃피다
소리꾼 장사익

 봄이 오면 매화는 가장 먼저 피지만 가장 먼저 가고 능소화는 한여름에도 찬연히 피어난다. 꽃도 저마다 만개하는 시기가 있듯이 인생에도 저마다의 때가 있기 마련이다. 45년의 긴 밤을 보내고 활짝 꽃핀 인생 후반기를 행복하게 보내고 있다는 소리꾼 장사익을 만나본다.

 

노래하는 것이 즐거워 

 

약 3년 전부터 우리는 무대에서 소리꾼 장사익을 좀처럼 볼수 없었다. 성대결절로 세 번의 수술을 거치고 재활 중이었던 데다가 코로나19 사태까지 겹쳤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지난해 하반기부터 그는 서서히, 조금씩 무대에 다시 서기 시작했다.

“그동안 노래를 하지 않으니 사는 의미가 없더라고요. 공연을 다시 하니 이제 좀 숨 쉬는 것 같고 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요. 그래서 노래가 세상에 나와서 내가 꼭 해야 할 일이 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고, 지금 행복하고 즐겁게 공연하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상업성을 띠는 행사 무대는 곤란하지만 자신의 음악을 오롯이 들려줄 수 있는 공연이라면 요즘 큰 무대 작은 무대 가릴 것 없이 많이 다니고 있다고 한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 간의 소통이 단절되고 외롭고 쓸쓸함을 느끼는 분들이 많은데 제 노래가 아름다운 시처 럼, 때로는 따뜻한 손길처럼 세상 구석구석을 비추거나 어루만지면서 감동을 주고 위안을 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슬픔을 치유하는 노래의 힘


그가 공연을 통해서 음악의 힘을 느낀 적은 여러 번이지만 대표적인 사례가 두 개 있다. 한 번은 그가 대전에서 공연을 했을 때였다. 공연을 마치고 사람들이 그에게 사인을 받기 위해 긴 줄을 섰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 자기 차례가 된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한 남성이 이렇게 말했다.

“장 선생, 나는 사인은 필요 없어요. 단지 이 말을 하려고 기다렸어요. 오늘 아침까지 정신의학과 약을 먹어왔는데 선생의 노래를 듣고 마음이 아팠던 게 다 나았어요. 약을 끊어도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때 그는 청중과 함께 울고 웃으며 마음속의 앙금을 씻어내고 다시 흰 도화지 같아진 마음 위에 새로운 삶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하는 노래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또 한 번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잡힌 부산 ‘영화의전당’ 야외무대 공연에서의 일이었다. 전체적으로 침울하게 가라앉은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주변에서 공연을 만류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하지만 이미 오래 전에 모든 표가 매진됐었고 많은 팬들의 기다림을 외면할 수 없어서 공연을 강행하기로 했다.

“그때도 저는 음악에 슬픔을 치유하는 힘이 있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공연이 시작됐을 때 세월호 추모의 의미를 담은 노란 리본으로 전면 스크린을 가득 채웠습니다. 객석 뒤에도 노란 리본을 달았지요. 제 노래가 또 죽음과 관련된 노래가 많다 보니 그 공연은 세월호 참사를 애도하는 공연으로 많은 이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었던 것 같아서 음악인으로서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특히 그 공연에서 ‘허허바다’라는 곡을 불렀는데 “찾아가보니 찾아온 곳 없네 / 돌아와보니 돌아온 곳 없네 / 다시 떠나가 보니 떠나온 곳 없네 / 살아도 산 것이 없고 / 죽어도 죽은 것이 없네 / 해미가 깔린 새벽녘 / 태풍이 지나간 허허바다에 / 겨자씨 한 알 떠 있네”라는 노래 가사에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리고 공감해주었다고 한다.

 


 

좀 촌스러워도 괜찮다


장사익은 45세에 가수로 늦깎이 데뷔를 하기 전 무려 15개의 직업을 거쳤다. 무역회사, 전자회사 영업사원, 노점 상, 카센터, 독서실 운영, 가구점 총무 등 여러 직장을 전전하면서 항상 음악에 대한 꿈을 잃지 않았다. 처음엔 가수를 할 생각을 못하고 이광수 사물놀이패에서 태평소 연주자로 먼저 활약했다. 그런데 1994년 여름 사물놀이패 공연 뒤풀이에서 그가 우연히 ‘대전 부르스’를 부르게 됐다. 그걸 들은 피아니스트 임동창이 그의 음색과 가창력에 반하여 가수 데뷔를 권했다고 한다.

 

그 후 장사익은 1996년 KBS 국악대상 금상, 2006년 국회 대중문화 미디어대상 국악상 등을 받으며 두각을 나타냈고 스스로 작사·작곡한 ‘찔레꽃’이 크게 히트하기도 했다. 이윽고 사람들은 그를 그냥 가수가 아니라 ‘소리꾼’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원래 소리꾼이라는 명칭은 우리 국악의 명창들에게만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국악인도 아니고 대중가요 가수인데 소리꾼으로 불리고 있어요. 아마도 우리 대중들이 국악의 명창들처럼 제대로 노래를 하라는 뜻으로 그렇게 붙인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에겐 아주 영광스러운 호칭입니다.”

그는 대중가요를 하지만 국악, 블루스, 트로트, 칸초네 등 여러 장르가 섞인 것 같은 음색과 가락을 들려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노래에는 한국적인 무엇 인가가 꼭 들어가 있다. 누군가 ‘신파’라든지, 촌스럽 다고 해도 개의치 않는다. 된장찌개처럼 정겹고 구수한 노래를 하는 사람으로 늘 기억되고 싶다. 지난 평창동계올림픽 폐막식에서 애국가를 부른 것도 그다.

 

이제 그는 한국인의 한과 정서를 대표하는 가수라 해도 무방하다. 유명해진 지금도 여전히 대중교통을 애용한다. 지하철 차량 안에 있으면 가끔 알아보는 사람들도 있다.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혹시 누구 닮았다는 얘기 많이 안 들으세요?”라고 물어봐요.

그러면 “아! 예, 그런 얘기 많이 듣습니다.”라고 웃으며 대답합니다.”

 


 

남은 인생은 밝은 낮처럼


그는 자신이 지금 노래를 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 참기적과도 같은 일이라고 말한다. 최근 TV 오디션 프로그램들을 보면 우리나라에 노래 잘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요즘 나오려고 했다면 더욱 데뷔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2년 후에는 데뷔 30주년이다.

“의학의 발달로 오늘날 사람이 평균적으로 90살까지 산다고 치면 데뷔하기 전 45년 동안의 인생은 많은 좌절을 겪었던 밤이었어요. 그때 긍정적인 마음을 먹지 않고 뭔가 허튼 짓을 했더라면 지금의 내가 없었겠죠. 그런 시련을 견뎌냈기 때문에 인생 후반기 45년은 밝은 낮처럼 살아간다고 생각해요.”

 

좋은 일이 있기까지는 슬픔도, 어두움도, 무거운 일도 있다. 과정을 무시하고 한 방에 좋은 결과로 뛰어 넘어갈 순 없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삶을 통해 스스로 체득한 교훈이라고 한다.

얼마 전 KBS2TV ‘불후의 명곡’ 녹화를 끝냈고 곧 방송될 예정이며 취미로 그동안 찍어온 사진들을 갖고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열 계획도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대중이 붙여준 ‘소리꾼’이라는 명칭에 누가 되지 않도록, 삶의 애환과 기쁨이 묻어나는 좋은 노래 들을 부르며 많은 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주고 싶다고 힘주어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