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도> 240x120cm, 2021, 나무 위에 옻칠, 자개
전통적인 옻칠 기법을 사용한 화폭 위에 꽃이 피고 새가 날고 바람이 불고 환한 달이 뜬다. 만남과 추억의 심상이 교차하며, 우주에서 뿜어져 나온 듯한 우아하고 찬란한 기운이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세계적인 명품 시계 브랜드마저 탄복하여 협업을 요청한 칠예가 전용복의 작품세계 속으로 들어가본다.
자료제공 : 갤러리 라메르 참고도서 : <한국인 전용복>, 시공사 펴냄
가장 모던하고 가장 고전적인 미
검은 하늘에 오색영롱하게 빛나는 달님, 그아래로 나부끼는 갈대와 들판의 이름 모를 풀들이 시적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유구한 역사의 강 위로 소용돌이치는 혼불, 그 위로 흩어지는 수많은 선조들의 숨결이 영롱한 자개의 가루. 그 어떤 현대회화보다도 모던하고 그 어떤 고전작품보다도 고졸(古拙)하다.
지난 12월 1일부터 19일까지 인사동 ‘갤러리 라메르’에서 열린 세계적인 거장 전용복 칠예가의 전시에서 많은 사람들은 압도적인 미의 향연 앞에 할 말을 잃었다. 어렸을 적 집안에서 흔히 보았던 구닥다리 나전칠기 장롱에 대한 고정관념은 발붙일 데가 없었다.
우리 전통 칠예가 이렇게까지 깊이가 있고 품격이 높았던가. 그 칠흑의 심연에서 피어난 꽃은 누구나 한 번 보면 쉽게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옻칠의 신비에 빠져든 청년
전용복 칠예가는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이었던 1953년 부산 복천동에서 태어났다. 군데군데 합판으로 기운 자국이 너덜너덜한 판잣집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내야 했던 그. 아버지는 항상 술에 취해 들어오셔서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동래고등학교에서 수재로 이름났던, 집안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형마저 결핵성 뇌막 염으로 그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세상을 떠났다. 이후 소년가장이 된 전용복은 어머니의 약값과 동생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고단한 그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었던 것은 미술시간이었다. 생계 때문에 비록 화가의 꿈을 단념해야 했으나 한시라도 그림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적 없었다. 그랬던 그에게 옻칠과의 운명적인 만남이 찾아왔다. 군대 제대 후 몇 군데의 직장을 전전하다 들어가게된 한국목재주식회사에서 가구회사 설립을 추진했는데, 그가 영업과 디자인을 총괄하는 책임자가 된 것. 그때부터 억눌러왔던 그의 예술적 감각과 끼가 폭발했다.
그는 현란하게 나전으로 뒤덮인 당시의 디자인 트렌드를 벗어나 여백의 미를 한껏 살리며, 한국적 정서와 서양식 추상화 기법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새로운 형태의 옻칠 가구를 만들었다. 가구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 갔지만 그는 거기서 만족하지 못했다.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펼치고 싶은 꿈이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회사를 나와 자신만의 가구공방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카슈’라는 화학성 옻칠이 대부 분이었던 시절, 그는 우연히 우리나라 전통의 와태칠 기법과 고온경화 기법을 알게 됐고 그것을 자신이 만든 가구에 적용해가며 옻칠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일본 장인들을 제치고 최고의 반열에 올라
전용복을 세계적인 대가 반열에 올려준 결정적 사건이 있으니 바로 지난 1991년 도쿄 메구로가조엔(目黑雅敍園)의 칠예 작품들을 복원하며 선풍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일이었다. 메구로가조엔은 박물관을 방불케 하는 수많은 나전 작품을 보유한 일본의 국보급 호텔로, 건립 이래 숱한 자연재해들로 곳곳이 파손되어 무려 12조 원이 투입된 복원공사를 진행하게 됐다.
그 당시 메구로가조엔 복원공사 가능성을 듣고 그는 3년 동안 일본의 장인들을 한 명씩 만나며 관련된 기술들을 습득하였다. 복원공사의 담당자 모집에 유일한 한국인이었던 그는 3,000명의 쟁쟁한 일본의 옻 장인 들을 제치고 대형 프로젝트의 담당자가 되었다. 결국 그는 5,000여 점의 칠예 작품을 성공적으로 복원시키며 일본 현지에서 ‘세계 최고의 칠예가 한국인 전용복’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2004년에는 작가의 작품 100여 점이 전시된 ‘이와야마 칠예 미술관’을 개관하 였고, 이곳에 세계 최대 규모의 칠예 작품인 ‘이와테의 혼’을 발표하면서 다시 한 번 최고의 작가로서 이름을 높였다.
옻칠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다
그는 전통적으로 쇳가루를 넣은 까만 색상의 옻 사용에 국한되지 않고 옻에 다양한 색상을 섞어 상품과 예술품에 적용하는 등 시대에 맞는 변화를 수용해왔다. 흔히 옻칠하면 검은 색상의 자개, 나전칠기 작품만을 연상하기 쉬우나 전용복은 옻의 고유한 컬러를 살리는 기법은 물론, 옻에 천연 암채를 배합하여 다양한 색상을 연출해내는 방법으로 우리 조상의 전통 기법에 모던함을 더했다. 이로써 공예적인 성격이 강했던 옻칠을 순수 미술의 영역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황토와 같은 새로운 소재를 개발하고 연구하여 표현 영역을 확대했다. 금속 위에 옻칠예 기법을 적용해 세계 최초로 옻칠 엘리베이터를 만들기도 했다.
이를 통해 단순한 공예품을 넘어 예술적 가치가 높은 칠예 회화 및 설치 작품들을 발표 해온 것이다.
그는 국제적으로 활동무대를 넓혀가는 중 세계적인 명품 시계 브랜드 ‘세이코’의 주문을 받아 보석 장식 하나 없이 나전옻칠 기법으로만 제작한 시계를 만들기도 했다. 5,250만 엔(당시 시가 8억 원)짜리였던 손목시계는 3개월 만에 수집가에게 팔려 화제를 모았다.
팔만대장경은 무려 700년이 지나도록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데 그 비결은 마감재로쓴 옻칠 덕분이었다. 전용복은 이처럼 명맥이 끊어져 가던 우리 조상들의 전통 옻칠 기법을 복원하였으며 이를 현대적인 회화로 승화시키면서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서구에 옻칠 강국으로 먼저 알려진 일본에서조차 그의 명성은 그 누구에도 뒤지지 않는다. 그는 자서전 <한국인 전용복>에서 평생을 바친 옻칠에 대한 애정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나는 육신과 영혼을 모두 바쳐이 땅의 옻칠 문화의 부활에한 점 빛이라도 되길 기원한다.
그리하여 보잘것없는 내 삶이 이 땅의 옻칠 문화라는 가마때기에 바늘구멍만큼의 자취라도 남길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 <한국인 전용복>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