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고기잡이 나간 남편을 하염없이 기다린 여인이 있었다. 오지 않는 남편을 향한 그리움에 망부송이 되어버린 그 여인을 푸른 뱀이 용왕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줬다고 한다. 이런 전설이 전해져오는 청사포는 이제 길고양이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마을로도 유명해졌다. 고양이의 사뿐사뿐 발걸음에 속도를 맞춰 마을을 여유로이 거닐어보자.
한적한 어촌에 부는 변화의 바람
번화한 해운대 신도시, 지하철 장산역 7번 출구 방향으로 나와 고개를 하나 넘으면 전혀 다른 분위기의 한적한 어촌이 펼쳐진다.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가 마주보고 있는 자그마한 포구. 통통배는 하얀 포물선을 그리며 바다를 가로지르고, 마을 아낙네들은 갓 건져올린 미역을 손질하고 있다. 여기가 부산이 맞나 싶지만, 부산이 맞다.
청사포는 오래 전부터 부산시민들에게 소중한 휴식 처였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푸른 이끼로 뒤덮인 바닷가에 파도가 철썩철썩 부딪히는 소리를 들어가며 불판 위에 노릇노릇 익어가는 조개구이를 즐겨왔다.
최근 청사포는 해안선을 따라 루프탑 카페가 속속 들어서고 해변관광열차가 서며, 다릿돌전망대가 생겨나 더욱 볼거리가 풍부한 관광어촌으로 변했다.
또한 길고양이들을 만나기 위해 전국 곳곳에서 여행객들이 찾아온다. 이제 부산시민만의 숨은 명소가 더 이상 아니게 된 점이 안타깝지만 작은 어촌마을에 다시 활기가 돌게 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파도소리에 더해 ‘갸르릉’거리는 소리
한옥카페 ‘청사포역’의 계산대 위에는 길고양이 ‘한 옥이’가 주문한 음료가 제대로 나왔는지 감시한다.
이따금 업무가 지겨워지면 테이블 아래로 내려가 기지개를 쭉 펴거나 한숨 늘어지게 잠을 청하기도 한다. ‘카페 일다’의 터주대감 김샤니는 소파 한 구석을 꿰차고 식빵을 굽고 있다. 김샤니는 낯선 사람들의 손길을 싫어하지 않는다. 다만 만사가 귀찮다는 듯이 ‘만지고 싶으면 만져보라’는 식이 다. 청사포 입구쪽 샛길 일대를 일컬어 ‘캣웨이’라고 한다.
이곳은 일찌감치 영화 <고양이 집사 >에도 등장해 화제가 된 ‘국내 애묘 인들의 성지’이다.
청사포 주민들과 ‘고양이발자국’이 함께 마련한 길고양이 급식소를 계기로 호빵이, 한옥이, 모리와 같은 인기 길고양이들이 탄생했다. 길고양이들 에게는 청사포 마을 전체가 제 집이다. 때로는 주민들의 생활에 참견하 고, 때로는 관광객들과 놀아주며 청사포의 귀여운 마스코트가 됐다.
청사포를 지켜온 사람들의 삶
1992년 부모를 따라 첫 승선을 하게 된 한윤복(52) 어촌계장은 “17세기경 해안선을 따라 동북에서 남서로 길게 펼쳐진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당시에는 파도가 이만큼 세지 않았고 너울성 파도가 와도 잔잔한 정도”라고 회상했다.
봄에는 도다리, 여름에는 장어, 가을에는 쥐치가 많이 난다. 청사포는 미역 생산지로도 이름이 높다. 이 맑고 물살이 거센 다릿돌에 달라붙은 돌미역은 최고의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한 계장은 “당시 어려운 시기다 보니 해녀를 비롯해 잠수부도 많았다”며 “현재 42명의 해녀가 등록돼 있지만 고령화로 실제 물질을 하는 인원은 19명에 불과하다”고 전했다.
골매기 할매의 망부송 전설과 관련해 그는 “4년마다 한 번씩 마을 어르신들이 날짜를 골라 풍어제를 지내고 있다”며 “이곳 서방파제 벽화에 그려진 망부송 전설은 어릴 때부터 구전돼왔던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잠시 길을 잃어도 좋은 청사포
청사포에 온 젊은이들은 루프탑 전망대가 있는 카페를 즐겨 찾는다. 요즘 부쩍 늘어난 이런 종류의 카페 들은 주인들이 저마다의 개성과 취향에 맞게 이국적인 분위기로 루프탑을 꾸며놓았다. 이곳에서 젊은이들은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등에 올릴 ‘인생샷’을 찍기에 여념이 없다. 해운대처럼 장대한 해변은 아니지만 소박한 어촌과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 너머 푸른 지평선을 바라보노라면 어느 지중해의 한적한 마을로 옮겨온 것만 같은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청사포에 간다면 시계나 휴대폰은 잠시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두자.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다 보면 곳곳에서 마주하는 그립고 애틋하고 따뜻한 풍경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마음이 부드럽게 녹아내릴 것이다.
무엇보다 귀여운 길고양이들과, 또 그들을 살뜰하게 챙겨주는 마을 주민들과의 만남이 있는 곳, 청사포에서라면 잠시 길을 잃고 정처 없이 헤매도 좋다.